퍼주기, 그것은 증오의 이데올로기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태복음 6장3절에 나오는 말이다. 남을 도울 때 마음가짐은 그래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그것을 순진한 생각이라고 한다. 그러면 인도주의를 거론하지 않겠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겠다. 남북관계에서 대북지원은 무엇인가? 대화를 여는 협상 수단이었고, 상호 신뢰를 높이는 근거였으며, 더불어 살겠다는 공존의 의사표현이었다. 경제적 협상 수단을 포기한 채 남북회담을 할 수 있을까? 인도적 지원 없이 이산가족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이명박 정부의 ‘퍼주지 않겠다’는 완고한 결의, 언제까지 갈까? 이데올로기는 진실이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남쪽 사회에서 받는 사람의 자존심에 대한 고려보다, 주는 사람의 자만심이 넘쳐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인도적 지원은 북한이 먼저 했다. 1984년 여름, 남쪽에 비가 많이 왔다. 7월 중순까지 집중호우가 내려 사상자가 70여 명이나 발생했고, 8월 말 또다시 내린 비로 사상자가 339명이나 발생했다. 북한은 그해 9월8일 방송을 통해 쌀 5만 석(약 7800t), 옷감 50만m, 시멘트 10만t, 기타 의약품을 지원하겠다고 제의했다.
“도와주겠다.” 그런 제안은 처음이 아니었다. 냉전시대, 모든 것이 경쟁이었던 시절, 남북관계에서 도와주겠다는 의사는 곧 우월감의 표현이었다. 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도와주겠다고 나선 쪽은 주로 북한이었다. 1954년 제네바회담에서 남일 부수상이 남북 경제협력을 제안한 이래, 북한은 주기적으로 ‘전력 송전 용의’(1955), ‘수재민 원조’(1956), ‘구호미 무상 제공’(1957), ‘풍수해 이재민 구호물품 제공’(1959) 등의 제안을 계속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다. 그때마다 남쪽은 ‘정치선전에 응하지 않겠다’면서 거부했다. 받을 사람은 받을 수 없고, 주는 사람 역시 받을 것이라고 예상치 않았다. 그냥 ‘제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984년 북한의 수해지원 받아들여그러나 전두환 정부는 받았다. 빈말의 관행을 깨버렸다. 1985년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이 정상회담을 논의하기 위해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김 주석은 ‘대단한 용기’라고 평가했다. 북한도 놀랐을 것이다. 당시 북한도 타이에서 쌀을 수입하던 시절이었다. 왜 받았을까? 당시 정부는 “우리가 주기 위해서는 받는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당시는 1983년 아웅산 사태가 일어난 지 겨우 1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전두환 정부는 북의 지원을 받아들였다. 왜 그랬을까? 남북대화를 재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던 전두환 정부 처지에서 한반도의 평화적 환경 조성이 필요했다. 정책은 누구처럼 자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존심보다 한반도의 정세 관리가 더 중요했다. 결국 수해물자를 받는 용기는 1984년 경제회담과 1985년 최초의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사업으로 이어졌다. 남북한은 서로 밀사를 교환하면서 남북 정상회담을 논의할 수 있었다.
물론 분단 이후 최초의 원조물자 제공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경쟁시대에 북쪽은 당연히 생색을 내고 싶어했다. 남쪽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북한은 실무협상에서 자동차와 배로 직접 물자를 실어갈 것이고, 수해 지역을 방문해 수재민을 위로하겠다고 주장했다. 남쪽은 세계적십자연맹 재해구호 원칙에 따라 받는 쪽이 인도 지점을 결정해야 한다고 맞섰다. 북쪽은 서울까지 오겠다고 했으나, 남쪽은 판문점 남쪽 지역에서 인수하겠다고 고집했다. 결국 쌀·천·의약품은 판문점, 시멘트는 인천항과 북평항(동해항)으로 들어왔다.
당시 북쪽의 수해 현장 접근을 거부하는 명분으로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내건 것은 “(북한이) 인도주의를 앞세워 정치선전을 하려 한다”는 논리였다. 당시 북한의 수해물자 인도 과정을 보도한 신문 기사 옆에는 ‘인도주의 물자제공, 그럴수록 대공자각’이라는 반공표어가 붙어 있다. 쌀은 수해를 당한 농가별로 피해 정도에 따라 33kg에서 66kg까지 분배됐다. 물론 북한 쌀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왠지 꺼림칙하다‘고 반납한 사람도 있고, ‘쌀이 좋지 않다’고 떡을 해 먹은 사람도 있었다. 물론 북녘 쌀 한 줌을 얻어 제사를 지내겠다는 실향민들도 적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 쌀지원 후폭풍 맞아그 뒤 10년의 시간이 흐른 1990년대 중반, 이번에는 북한에 ‘큰물 피해’가 발생했다. 1995년 8월 북한의 유엔 대표부가 유엔 인도지원국에 긴급구호를 요청했다. 참혹한 기근이 시작됐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1995년 유진벨재단의 린튼 형제는 영양실조로 또는 약이 없어 싸늘한 병실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고 식량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유엔기구들이 나섰고, 국제적인 구호단체들도 대북지원을 시작했다.
남한 정부는 어떻게 했는가? 김영삼 정부 시절이었다. 1995년 6월 김영삼 정부는 15만t의 국내산 쌀을 지원했다. 그것으로 대북 직접 지원은 끝이었다. 당시 쌀을 주면서 뺨을 맞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쌀을 싣고 떠난 남쪽 배에 인공기가 게양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북지원은 보수적 후폭풍에 직면해야 했다. 남북관계는 악화됐다. 다행스럽게 이때부터 굿네이버스를 비롯한 민간단체들이 대북지원 사업을 시작했고, 종교계도 인도적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필요한 것은 긴급구호였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외면했다. 민간의 대북지원에 대해서도 창구 단일화 방침을 고수했다. 민간단체가 직접 북한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시켰고, 대한적십자사를 통해서만 지원이 가능하게 했다. 지원 창구 문제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9년 2월에야 ‘창구 다원화’ 방침으로 변경됐다. 민간단체의 대북지원에 대해 남북협력기금이 지원된 것도 김대중 정부 때부터다.
기근의 후유증은 오래 지속된다. 유엔아동기금(UNICEF)과 세계식량계획(WFP) 등 유엔 기구들이 북한 보건당국과 함께 어린이와 임신 여성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적이 있다. 1998년 첫 번째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수준의 영양실조인 급성 영양장애가 15.6%, 나이에 비해 체중이 적은 체중 미달이 60.6%, 그리고 장기적인 영양 부족으로 발육 부진을 보이는 영양장애가 62.3%에 달했다.
대기근을 거치면서 남북한의 인종이 달라졌다. 무슨 말인가? 남북 나눔 운동을 이끌었던 홍정길 목사는 1998년 평양을 방문했던 캐나다 토론토대학 교수의 말을 충격으로 받아들였다고 회고한다. “북한 어린이들이 현재의 상태로 간다면 다수가 절대적인 영양결핍으로 정신장애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대로 가면 인종이 달라집니다. 이는 분명 당신 민족의 비극이 될 것입니다.”
질병관리본부가 2007년에 14살 미만 탈북 청소년의 키와 몸무게를 조사한 적이 있다. 남한 청소년에 비해 키는 16cm, 몸무게는 16kg이나 차이가 났다. 체형의 분단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김대중 정부 이후 대북지원이 증가하면서, 북한의 보건·의료 상황도 조금씩 개선됐다는 점이다. 2006년 북한 당국이 자체 조사한 영유아의 영양불량 상태는 1998년과 비교해 많이 개선됐다.
정부 차원의 대북지원도 김대중 정부 들어와서 재개됐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정부는 비료 30만t과 타이산 쌀 30만t, 중국산 옥수수 20만t을 차관 형태로 지원했다. ‘퍼주기’라는 말은 그때 처음으로 등장했다. 야당과 보수언론은 북한 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제기하면서 대북지원에 반대했다. 국내의 어려운 경제 상황도 활용됐다.
사실 민간 차원의 대북지원은 인도주의 원칙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대북지원은 전반적인 남북관계와 연관돼 있다. 김대중 정부는 이산가족 문제를 비롯한 현안을 풀기 위해 경제적 수단을 활용했을 뿐이다. 남북관계에서 긴장이 높아지거나 핵 문제가 악화되거나 남북대화가 중단되면 정부 차원의 지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쌀 지원은 국내적 필요성도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00년대 초반 당시 국내산 쌀 재고는 심각한 문제였다. 쌀 생산량은 늘어나는데 소비량은 줄어들고, 여기에 우루과이라운드에 따라 의무수입이 늘어나면서 2002년 후반기에는 남아도는 쌀이 1318만 섬에 달하는 것으로 예측됐다.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100만 섬 기준으로 창고 보관비는 연간 450억원에 이르렀다. 당시 농림부는 네 가지 처리 방법을 제시했다. 100만 섬을 기준으로 비용을 계산해보면, 해외 원조 3396억원(주로 운송비), 사료 2590억원, 주정 2527억원, 대북지원 2422억원 순이었다.
농림부가 사료용으로 사용할 계획을 비치자, 많은 사람들은 “사람 먹는 쌀을 소·돼지에게 줄 수 있느냐? 차라리 북한에 식량을 보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쪽은 없어서 굶어죽고 남쪽은 남아서 난리, 이 또한 분단의 풍경인가? 너무 심하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분배의 투명성 강화 현실성 있나이명박 정부는 대북지원 방식을 차관에서 무상 지원으로 변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2000년 대북지원 과정에서 차관 형식을 선택한 것은 야당의 ‘퍼주기’ 주장 때문이었다. 당시 차관 조건은 10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 연리 1%였다. 이명박 정부의 임기 이내인 2011년 처음으로 2000년에 지원한 1057억원의 5%에 해당하는 50여억원을 상환받아야 한다. 받는 사람도 갚겠다는 의사가 부족하고, 주는 사람도 반드시 받겠다는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차관의 상환기일이 다가오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무상 지원으로 전환하는 대신 더욱 강화된 분배의 투명성을 내세우고 있다. 현재의 남북관계 현실에서 그것이 가능한지 묻고 싶다. 지난 시절 대북지원은 막힌 남북관계를 푸는 열쇠였다. 지금은 어떤가? 퍼주기 이데올로기가 대북정책의 발목을 잡고 있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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