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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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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가는 길, 잡초가 막아서네


2004년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열었던 중소기업의 ‘희망의 땅’ 개성공단,
말 바꾸는 사람들 때문에 어둠의 땅으로
등록 2009-01-16 02:49 수정 2020-05-02 19:25

“산비탈의 작은 샛길도 사람들이 다니면 넓은 길로 변하지만, 잠시라도 그 길로 다니지 않으면 잡초가 자라 길을 막는다.”( 진심장구 하편)
맹자님 말씀이다. 개성으로 가는 길에 잡초들의 아우성이 넘쳐난다. ‘망해도 좋다’고 떠드는 정치인, 북한 노동자를 위해 기숙사를 지어주면 노사분규가 일어난다고 말하는 대통령, 그리고 절망의 소동에 주역으로 등장한 통일부 장관. 잡초들이 길을 막아서고 있다.

그날 ‘리빙아트’ 사장의 눈물

2004년 12월15일 저녁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에서 개성공단 시범단지에 입주한 주방기기 업체 ‘리빙아트’가 생산한 시제품 판매가 한창이다. 이날 백화점이 문을 닫기까지 두 시간 남짓 동안 팔린 ‘통일냄비’는 무려 480세트나 된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2004년 12월15일 저녁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에서 개성공단 시범단지에 입주한 주방기기 업체 ‘리빙아트’가 생산한 시제품 판매가 한창이다. 이날 백화점이 문을 닫기까지 두 시간 남짓 동안 팔린 ‘통일냄비’는 무려 480세트나 된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개성에 가본 사람은 기억할 것이다. 몇 년 전 비무장지대 안, 옛날 장단역 근처에 누워 있던 녹슨 증기기관차를 본 적이 있다.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 없었던 철마의 꿈은 2006년 5월 마침내 실현됐다. 열차 시험운행 이후 소원을 푼 철마는 임진각 통일동산으로 옮겨졌다. 지금 다시 철로가 막혔다. ‘달리고 싶은 철마’는 이미 실현됐던 꿈을 또다시 꾸어야 하는 역설을 어떻게 생각할까. 임진각에 가서 묻고 싶다. 철마는 또다시 잡초가 우거진 (비)무장지대에 누워 있어야 하느냐고.

그 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지난 세월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4년 전인 2004년 12월15일, 그날 개성 하늘에는 진눈깨비가 간간이 흩날렸다. 개성공단에 진출한 첫 번째 공장의 준공식 날이었다. 필자는 통일부 장관 정책보좌관으로 그곳에 있었다. 그날 ‘리빙아트’라는 그릇 만드는 중소기업 사장의 눈물을 기억한다. 그는 말했다. 남쪽에서는 더 이상 그릇을 만들 수 없다고. 고급 주방용품은 프랑스 등에서 수입하고, 라면 끓이는 냄비는 대부분 중국산이라고 했다.

그날 그곳에서 만들어진 ‘통일냄비’ 1천 세트는 오후 2시 군사분계선을 통과해 6시 서울 소공동의 롯데백화점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테인리스 냄비 2종 세트를 사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실향민들이 많았다. 백화점 문 닫는 시간까지 약 2시간30분 동안 480세트가 팔렸다. 개성공단은 그렇듯 한국 중소기업의 출구였다. 1990년대 이후 중국으로 베트남으로 떠났지만, 결국 경쟁력에 밀려 유랑을 거듭하던 노동집약 업종들이 찾아낸 희망의 땅이었다.

그날의 개성을 기억한다. 허허벌판에 공장 하나 덩그러니 들어선 황량한 풍경을 기억한다. 길을 만들고 있었다. 구릉을 밀고 공장 부지를 조성하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날 이후로 필자는 1년에 한두 번은 개성공단을 방문했다. 상전벽해, 그 말의 의미를 체험할 수 있었다.

중국의 문호 루쉰의 말처럼, 희망이란 땅 위의 길과 같다.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된다. 개성으로 가는 길, 그곳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다. 물론 개성이 처음부터 후보지였던 것은 아니었다. 군사분계선에서 8km 떨어진 군사 요충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탱크가 넘어오던 그곳에 누가 공단을 만들 생각을 했겠는가. 1998년과 1999년 정 회장의 역사적인 방북이 이루어지면서 공단 조성 문제가 본격적으로 협의됐다. 현대 쪽은 처음에 해주를 원했지만, 북한은 신의주를 추천했다.

남쪽 빛, 북쪽 어둠이 선명한 위성사진

개성이 후보지로 부각된 것은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때문이었다. 정상회담 이후인 2000년 6월29일 원산 동해함대 해군기지에서 정 회장은 고 정몽헌 회장과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그곳에서 김 위원장이 개성을 공단 후보지로 제시했다. 그때 정주영 회장이 물었다. “공단에 약 35만 명의 노동자들이 필요한데, 개성시 인구는 어림잡아 20만 명 정도다. 나머지 인력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김 위원장이 대답했다. “그때가 되면 군대를 옷 벗겨서 공장에 투입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군인들을 노동자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한반도 평화와 이를 위한 군축이 필수적이라고 언급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개성이 공단 후보지로 확정됐다. 분단의 세월 동안 굳게 닫혀 있던 통문이 열렸다. 지뢰가 걷히고 길이 났다. 공단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남북한의 신뢰 형성 과정이었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과정이었다.

개성공단은 중소기업의 활로이자, 반세기 대결의 역사를 가르는 화해와 협력의 거대한 시험무대다. 경기 파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 앞에서 바라다본 개성공단 모습. 한겨레 이정아 기자

개성공단은 중소기업의 활로이자, 반세기 대결의 역사를 가르는 화해와 협력의 거대한 시험무대다. 경기 파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 앞에서 바라다본 개성공단 모습. 한겨레 이정아 기자

물론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제일 어려운 걸림돌은 미국과의 협의였다. 개성에 공장을 짓기 위해서는 설비가 들어가야 하는데, 북한은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돼 있었다. 미국산 부품·기술·로열티가 10% 이상 포함된 물자를 테러지원국에 반출하기 위해서는 미국 상무부의 심사를 거쳐야 했다. 2004년 8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 국방부 장관실에서 도널드 럼즈펠드 장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오콘으로 분류되던 그는 한반도 인공위성 사진 1장을 보여줬다. 남쪽의 빛과 북쪽의 어둠이 선명히 인쇄된 사진을 가리키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정동영 장관은 개성공단이 성공하면 풍경이 달라질 것이라고, 빛과 어둠의 대비가 아니라 공동 번영의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미국과의 협의 과정은 한국 정부의 적극적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은 개성이라는 도시가 한반도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사람들에게 개성은 서울에서 60km 정도 떨어진 곳이고, 중부전선에서 군사력이 가장 밀집해 있는 지역이며, 그래서 개성공단 건설은 북한의 개혁·개방, 남북 경제협력,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완화를 실질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을 되풀이했다. 설명이 끝나면 그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당시 미국의 공감을 얻은 것은 군사적 전용이 가능한 민감한 설비들에 대해서는 무선 인식 전자태그(RFID)를 붙여 관리해나가겠다는 우리 쪽의 설명이었다. 이 기술은 전자칩이 부착된 신분증처럼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것이다. 국내적으로도 전략물자 심사 제도를 더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최고 매력 ‘양질의 저렴한 노동력’

가다 서다 하는 남북관계도 개성공단 조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2004년 12월 첫 번째 공장 준공식에 참석했을 때, 정동영 장관은 북쪽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당시 남북관계는 냉각기였다. 정부가 동남아에 있던 대규모 탈북자를 입국시키고 고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 장로의 김일성 주석 사망 10주기 조문 방북을 불허하면서, 남북의 모든 당국 간 대화가 중단된 상황이었다. 정동영 장관이 축사를 하는 동안 주동찬 중앙특구개발 총국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퇴장했고, 악수조차 외면했다. 물론 2005년 다시 남북관계가 풀렸을 때, 주동찬 국장은 당시의 홀대를 사과했다.

북한은 이후에도 개성공단의 지지부진에 늘 불만이었다. 그러나 남쪽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적지 않았다. 북핵 문제를 비롯한 한반도의 정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미 양국의 강경 세력들은 희망의 길을 닫으라고 늘 주장해왔다. 투자 환경의 길은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개성공단은 중소기업들이 돈을 버는 곳이다. 경제성이 있어야 한다.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 이른바 보수적인 사람들은 중소기업들이 개성공단에서 어떻게 기업을 운영하고, 어느 정도의 이익을 실현하는지 관심이 없다.

물론 개성공단의 투자환경에서 앞으로 보완해야 할 점들이 적지 않다. 중국의 경제특구들이 걸어온 길을 생각해보자. 지금이야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중국의 대표적인 경제특구인 선전은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인구 3만 명의 어촌이었다. 처음에는 홍콩의 관광업자와 중소기업들이 터를 잡고, 섬유·신발 등 노동집약 업종부터 시작해 오늘날 전자산업의 ‘세계적인 공장’이 됐다. 그런 점에서 개성공단에서 노동·금융 분야의 개혁이 진전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고립된 섬으로 머물게 아니라, 북한의 국내 경제와 연결돼야 한다.

개성공단 진출 기업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는 매력은 역시 ‘양질의 저렴한 노동력’이다. 한 달에 65달러 정도의 임금을 주고 봉제를 하고 신발을 만들 수 있는 곳은 이제 지구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도 많이 변했다. 몇 년 전 상하이 인근의 쑤저우 공업원구를 방문한 일이 있다. 개성공단의 시사점을 찾기 위해 한국에서 진출한 인형공장이나 봉제공장을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20년 전 처음 상하이로 갔던 인형공장들은 몇 년 뒤 쑤저우로 밀려났고, 그 이후 얼마 안 있어 내륙의 열악한 지방공단으로 또 밀려났고, 최근에는 그것도 어려워 손을 털고 떠나오고 있다.

현재 개성에 진출해 있는 대부분의 기업들은 해외투자 경험이 있다. 그래서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상대적으로 투자환경은 불안정하다. 하지만 노동의 질은 좋다. 2년 혹은 3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있다. 중국이나 인도, 동남아에 투자한 경험이 있지만, 개성공단 정도면 할 만하다는 것이 그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김하중 주중대사의 달라진 말

정권이 바뀌었다고 말이 달라진 사람들이 참 많다. 개성공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2004년 12월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우리가 만난 중국의 고위층은 다들 개성공단에 대해 덕담을 해주었다. 특히 왕자루이 당 대외연락부장은 “개성공단 발전은 북한 경제뿐만 아니라 한반도 평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개성공단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시 김하중 주중대사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필자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중국 쪽 인사들은 개성공단의 중요성에 대해 김 대사에게 많이 들었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김 대사는 통일부 장관이 됐다. 그리고 2008년 3월 중순 김 장관은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개성공단의 확대가 어렵다는 발언으로 남북관계 중단의 계기를 제공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 인간은 되기 어려워도 괴물은 되지 말자.” 아마 그 영화에서 말하는 괴물이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거나 수치심을 잊은 생명체일 것이다. 정권이 바뀌니, 왜 이토록 괴물이 많아졌는가.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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