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은 기념할 만한 세월이다. 1998년 11월18일 첫 번째 금강산 관광선이 출발한 지 올해가 꼭 10년째다. 안타깝다. 개성공단의 문이 조금씩 닫히고 있는 상황은 금강산의 기억을 기념하기에는 을씨년스럽다. 그래도 아무 일 없이, 조촐한 기념행사 하나 없이 이렇게 보내도 되는지 묻고 싶다. 지난 10년 동안 금강산은 남북관계의 현주소였다. 철문이 닫히고, 인적이 끊어진 현재의 풍경 또한 새로운 남북관계의 현실이리라. 지난 세월을 떠올려본다. 얼마나 어렵게 헤쳐온 시간들인가. 금강산을 다녀온 195만 명의 추억을 끄집어내본다.
금강산 관광은 10년 전에 시작됐다. 1998년 6월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을 기억할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냉전의 해체로 상징되는 ‘20세기의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냉전의 섬 한반도에서 분단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소떼의 장면은 20세기에 안녕을 고하는 풍경이었다. 금강산 관광 사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기억하는가. 금강산 사업은 그보다 10년 전인 1989년에 이미 합의됐다는 사실을. 1988년 노태우 정부의 ‘7·7 선언’이 나오고, 비로소 남북 경제협력이 시작됐다. 북한의 허담 비서가 정주영 회장에게 초청장을 보낸 것은 1987년이지만, 방북이 실현된 것은 1989년 1월이었다. 초청장에는 방문 목적이 적혀 있었는데, 첫째가 금강산 개발 문제였다. 북한은 1987년부터 금강산 관광 사업을 위한 외국인 투자자를 찾고 있었다. 몇몇 일본 기업에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일본의 대기업들이 엄두를 낼 사업이 아니었다. 돌고 돌아, 결국 그런 상황에서 이 사업을 맡을 유일한 사람, 정주영 회장에게로 왔다. 금강산이 있는 강원도(북한) 통천은 그가 태어나 서당 3년, 소학교 6년, 본인의 말대로 “내 학력의 전부가 형성된 곳”이고, 일가친척들이 살고 있는 그곳은 바로 고향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처음부터 이 사업의 경제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방북 이후인 1989년 2월, 국회에 나간 정 회장은 중소기업의 참여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북한에서 뜯어먹을 것이 없고 벗겨먹을 것도 없는데, 초창기에는 큰 기업들이 본전치기하면서 북을 도와주고, 남북관계가 안정되고 장사가 될 때 중소기업이 나서는 것이 좋겠다. 이익이 난다는 보장이 없다”고 답했다. 첫 번째 방북에서 느꼈을, 기업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공적 사명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정 회장은 고향 통천에 갔을 때, 친척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다.
당시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노태우 정부는 정 회장의 방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정 회장은 방북 전에 노태우 대통령을 만났고, 노 대통령은 박철언 보좌관에게 적극 지원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후 정 회장이 국민당을 만들어 대통령 선거에 나갔고, 경쟁자였던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금강산 관광 사업은 물 건너갔다. 그때 이 사업이 시작됐더라면 남북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서 가정은 허망하지만, 김영삼 정부의 ‘공백의 5년’은 아무리 생각해도 야속하기만 하다.
어머니의 유언을 지킨 97살 할아버지일관성 없는 대북 강경정책을 지속하고 정치와 경제를 연계하던 김영삼 정부에서 금강산 관광 사업은 상상할 수 없었다. 금강산 사업이 다시 빛을 본 것은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금강산 관광 사업을 가장 열렬히 환영한 사람들은 이산가족들이었다. 1998년 11월18일 첫 배를 탄 일반 관광객 835명 중 45%가 이산가족들이었다. 이산가족들의 사연에야 예외 없이 눈물이 배어 있다.
1·4 후퇴 때 평안남도 진남포에 부인과 7남매를 남기고 내려왔다는 심재린 할아버지, 97살로 최고령 관광객이었다. 할아버지는 고맙다고 말했다. 함께 내려온 어머니는 임종하며 손을 잡고 이런 유언을 남기셨다. “너라도 살아서 고향 땅을 밟아라.” 어머니의 유언을 지킬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황해도가 고향이라는 70살의 김승룡씨는 북에 두고 온 어머니에게 “불효자를 용서해달라”고 절을 올리러 간다고 말했다. 고성군 해금강이 고향이라는 70살의 권만희씨는 부모님 제사를 지내러 관광선에 올랐다.
아쉬운 관광이 끝나고, 21일 저녁 9시 금강호가 장전항을 빠져나올 때다. 마침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바다로 나오면 분계선을 따라 확연히 구분되는 빛과 어둠의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남쪽으로는 가로등 불빛이 촘촘히 이어지다 도시의 불빛과 만나게 되지만, 북쪽으로는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그때는 숙박시설이나 편의시설도 없었다. 그날 관광을 마치면 다시 배로 돌아와 숙박을 했던 시절이다.
배가 항구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모두들 갑판 위에 나와 아쉬움을 달랬다. 이산가족들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우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누군가 멀어져가는 어둠을 향해 “어머니” 하고 목놓아 불렀다. 또 누군가는 갑판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금강산은 그렇게 이산의 한을 달래는 출구였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부터는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금강산에서 이뤄졌고, 2005년 8월에 착공한 이산가족 면회소는 2008년 초 완공됐다.
또한 금강산 관광 사업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998년을 기억하는가. 당시는 외국인 투자가 절실했던 시점이다. 투자를 검토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성’이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을 때,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매우 높았다. 김영삼 정부 5년이 남긴 불신과 대립도 여전했다. 그해 8월부터는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이 제기되고, 북한은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했다. 북-미 관계도 악화됐고, 한-미 양국의 강경파들은 ‘정밀 타격’을 주장하던 때였다. 한반도가 전쟁 직전까지 갔던 ‘1994년 6월’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어려운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는 금강산 관광 사업을 승인했다. 임동원 당시 외교안보수석은 이런 결정을 ‘일종의 모험’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안보위기와 경제위기, 이중의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결단이 필요했다”고 그는 회고록 에서 적고 있다. 그렇게 ‘길’이 만들어졌다.
효과가 있었을까? 그해 11월20일 저녁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서울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그는 숙소인 신라호텔에서 두 번째 관광선 봉래호가 떠나는 장면을 TV에서 보았다. 21일 정상회담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그러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한반도 위기를 외치는 강경파들을 잠재웠고, 한반도의 안보 상황을 우려하던 외국인 투자자들을 안심시켰다.
이후 10년 동안 금강산은 모진 풍파를 헤치고 한반도 평화의 상징으로, 이산가족 만남의 장으로, 사회문화 교류의 실험장으로 굳건하게 살아남았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사건도 적지 않았다. 1999년 6월 말 민영미씨 억류 사건이 발생하면서 45일간 관광이 중단되기도 했다. 민영미씨는 북쪽의 환경감시원(안내원)에게 “전철우나 김용이 TV에도 나오고 잘 살아요”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이들은 당시 남쪽에서 대중적인 탈북자였다. 민영미씨는 사죄문을 쓰고 닷새 만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북한의 의도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시범 사례’를 선택할 필요는 있었다. 관광객들은 방북교육을 받았는데도 그곳이 북쪽 땅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만물상에 올라 “대한민국 만세”를 부른 사람도 있었고, 북한의 환경감시원에게 북한 지도자들을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북한 체제를 고려한다면, ‘문제적 발언’이었다.
민영미씨 사건 이후에도 관광객들의 ‘문제 발언’은 계속됐다. 2000년 1월4일의 일이다. 30대 후반의 관광객 한아무개씨는 북쪽 환경감시원에게 휴대전화를 내보이며, 남쪽이 잘 산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했다. 또 “북한은 김일성과 김정일만 잘 먹고 잘 산다”고 발언했다. 원래 휴대전화는 반입금지 품목으로 관광을 하기 전에 현대 쪽에 맡겨야 했다. 북쪽 관리원은 사과문 작성을 요구했으나 한씨는 거부했다. 결국 9시간 만에 사과문을 작성하고 풀려났다. 민영미씨 사건을 계기로 남북이 합의한 ‘신변보장합의서’와 ‘관광세칙’에 따라 북한은 ‘문제 발언을 한 관광객’을 억류할 수 없었다. 규정에 따라 현대 쪽이 참여하는 임시조정위를 열어 사과문 작성 수준에서 해결했고, 벌금은 물지 않았다. 그런 사건들을 거치면서 하나씩 하나씩 절차와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 밖에도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2003년 4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발생으로 한 달 반 이상 관광이 중단됐고, 인민군을 차량사고로 사망케 하는 사건도 있었다. 간혹 정신줄을 놓고 북한에 귀순 요청을 한 사람들이 추방을 당하기도 했다.
일단은 만나야 대책을 세울 텐데남북관계의 악화는 금강산 관광의 가장 중요한 악재였다. 1999년과 2002년 서해에서 교전이 발생했을 때, 보수적인 사람들은 당장 관광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노무현 정부가 이런 여론에 굴복해 대북송금 특검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2006년 북한이 핵실험을 했을 때도 금강산 관광 중단 목소리가 컸다. 그런 운동을 주도한 보수적 운동권의 핵심 인사들이 현재 한나라당 의원으로 당선되고, 청와대에 근무하기도 한다.
물론 2008년 7월에 발생한 관광객 총격사건은 심각한 문제다. 관광객의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확고한 재발방지 대책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만나야, 따지고 대책을 세울 수 있다. 당국 간 관계가 모두 중단되고 민간교류도 위축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법이 마련되겠는가.
금강산 관광이 중단돼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다. 하나하나 문을 닫고 있다. 금강산에 이어 개성관광이 중단되고, 이제 개성공단의 문도 조금씩 닫히고 있다. 묻고 싶다. 이산가족의 아픔을 이토록 무시해도 되는가. 안보위기와 경제위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나라를 거덜내던 김영삼 정부의 악몽, 작금의 현실이 아니길 바란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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