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는 당파적이다. 가치가 개입된다. 북한 정보야 오죽하겠는가? 확인이 어렵다. 경멸과 증오도 작용한다. 그래서 언론의 북한 보도는 ‘아니면 말고’가 다반사다. 언론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다. 정부는 북한 정보를 수집하는 수단을 갖고 있다. 첩보를 분류하고 평가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그래서 정부의 정보 판단은 신중하고 정확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이 어디 그런가? 그동안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얼마나 많은 북한 정보를 왜곡하고 과장했던가?
세계적 특종이 세계적 비웃음거리로
냉전 시대 가장 중요한 북한 정보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에 관련된 것이었다. 한국 언론들은 그동안 여러 번 이들을 죽였다가, 다시 살려냈다. 압권은 1986년 11월18일로, 그날은 엽기적인 하루였다. 1938년 미국의 한 라디오 드라마에서 ‘화성 침공’이라는 가상 뉴스를 보도하자, 미국의 청취자들은 실제로 우주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착각했다. 그날 한국에서도 그랬다. 거의 모든 신문들이 ‘김일성 사망’을 1면으로 보도한 그날, 어찌 몇 시간 뒤에 그것이 ‘뻥’으로 드러날 줄 알았겠는가? 김일성 사망설은 가 그해 11월16일치에 처음 보도했다. 신문이 발간되지 않았던 17일에는 호외를 발행했고, 18일치 신문에는 총 12면 중 7개 면에 걸쳐 김일성 사망 배경, 국내외 반응, 자사의 특종에 대한 자화자찬 등을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온 국민이 김일성 사망 기사를 읽던 18일 오전 10시23분 〈UPI통신〉이 베이징발로 기사를 타전했다. 김일성 주석이 평양의 순안공항에서 몽골의 국가원수인 잠빈 바트문흐 총서기를 영접했다는 기사였다. 석간신문들은 일제히 “김일성 살아 있다”로 돌아섰다.
‘사망설’에서 시작해 ‘사망이 확정’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정부의 정보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해 11월17일 오전 국방부 대변인은 “대남 확성기를 통해 김일성이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방송이 나왔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기백 국방부 장관은 그날 열린 국회 예결위에서 “김일성의 사망 또는 내부 권력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여러 가지 근거를 댔다. 휴전선의 확성기를 통해 “김일성 어버이가 열차를 타고 가다 총격을 받아 서거하였다”는 내용이 방송되면서 장송곡이 연주됐고, 판문점 너머 북한의 선전마을에 인공기가 조기로 게양된 점 등 여러 근거를 소개했다. 그리고 몽골 총서기의 북한 방문이 취소됐다는 외교정보도 언급했다.
바로 다음날 한국은 ‘개망신’을 당했다. 몽골 총서기는 북한을 예정대로 방문했고, 김일성 주석은 공항에 나타났으며, 은 한-미 연합사가 확성기 대남 방송이나 조기 게양 사실을 부정했다고 보도했다. 소설 같은 하루가 지났다. 웃음거리가 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김일성 사망 정보를 주도했던 국방부와 세계적인 특종을 자랑했던 는 말할 것도 없고, 놀아난 사람들이 많았다.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한 공무원, 주식을 내다판 투자자들, 김일성 사망에 만세를 부른 보수 단체들,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필자가 아는 어떤 이는 그해 11월17일 저녁 방송의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는 당시의 낯 뜨거웠던 기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20년 이상이 흘렀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북한 정보에 대해서만은 과도하게 신중하다. 대단히 보수적인 인사임에도 말이다.
안기부가 저수량 200억t으로 뻥튀기북한 정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권력과 그러한 권력에 부합하고자 했던 언론의 합작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사망설’ 해프닝 한 달 전인 10월, 그야말로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냉전의 우화’가 펼쳐졌다. 금강산댐 사건이다. 북한이 1988년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물폭탄을 준비하고 있다는 엄청난 재난 경보였다. 보수 언론들은 일제히 금강산댐을 무너뜨리면 서울이 물에 잠길 것이라고 보도했다. 어떤 신문은 “63빌딩의 절반 가까이 물에 잠긴다”고 했고, “남산도 거의 잠길 것”이라는 전문가의 분석도 있었다. 텔레비전에 나와 국민을 겁주던 유명 대학의 토목공학과 교수들은 당시를 기억하는가? 부끄러움은 인간을 괴물과 구분하는 중요한 덕목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금강산댐은 북한에서는 임남댐이라고 부른다. 1980년대 초반부터 공사를 시작한 이 댐의 목적은 당연히 수력발전이고, 농업·공업·생활용수 공급이었다. 국가안전기획부의 초기 분석도 이 점을 주목했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정권은 북한의 ‘수공’ 가능성을 부각시켰다. 당시 안기부가 어떻게 정보를 왜곡하고 과장했는지에 대해서는 1993년 김영삼 정부의 ‘5공 청산’ 과정에서 속속들이 드러났다. 1993년 감사원의 감사결과에 따르면, 안기부는 금강산댐의 저수량을 부풀렸다. 미국의 공병 수로국이 37억t으로 계산한 저수량을 안기부는 최소 70억t에서 최대 200억t으로 과장해서 홍보했다. 얼마나 급했던지 당시 금강산댐의 규모는 한전 직원 1명이 위치를 추정해 8시간 만에 계산했다고 한다. 장세동 안기부장은 이 과정에서 국민의 대북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해 최대치를 발표하도록 지시했다. 서울이 물에 잠긴다는데, 어떤 국민이 불안하지 않겠는가? 평화의 댐을 하루라도 빨리 건설하라는 보수 언론의 나팔소리도 높았다. 그렇게 모아진 국민 성금이 661억원이었다.
올림픽 이전에 대응 댐을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성, 그것은 거짓이었고 한편의 거대한 사기극이었다. 감사원 감사에서 밝혀졌지만, 금강산댐의 저수량이 겨우 9억t 정도에 이르는 시기는 빨라도 1989년 10월이었다. 올림픽 이전이 아니라, 올림픽이 끝난 이후였다. 감사원은 북한이 그 정도 규모를 일시에 남쪽으로 흘려보낸다 하더라도 화천댐에 비상 배수구를 설치하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평화의 댐은 정치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냉전의 장벽이었다. 언론의 비판 기능이 사라지면, 토론과 논쟁이 억압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잊지 말아야 할 상징이다.
육성회견 나와도 “공개 처형됐다” 고집북한 정보 판단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손님은 또 있다. 북한 붕괴론이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난무하던 붕괴론을 기억하는가? 이른바 북한 전문가들이 당시 텔레비전에 나와 했던 말들을 기억하는가? 이르면 3일, 늦어도 3년 안에 북한은 무너질 것이라고 예측한 전문가도 있었다. 조금은 신중하게 보이려는 전문가들도 아무리 늦춰 잡아도 10년은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분석은 ‘기대’와 다르다. 북한 붕괴론은 예나 지금이나 ‘보수적 기대’의 이데올로기다.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과 만나서 생긴 일종의 관변 논리이기도 하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김일성 사후 노골적으로 흡수통일 의지를 밝히곤 했다. 1994년 8월15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통일은 갑자기 올지도 모른다”며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급변 사태 대비의 필요성이 강조됐고, 모든 국책 연구기관들은 남북 통합 대비 연구에 매진했다.
물론 김대중 정부 이후 남북 당국 간 관계가 개선되고 접촉이 활성화되면서 북한 정보 판단은 신중해졌다. 그렇지만 보수 언론들의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보도 행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너무 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낯 뜨거운 사례는 ‘유태준 사건’이다. 는 2001년 3월 부인을 만나기 위해 북한에 들어갔던 유태준이라는 탈북자가 공개 처형되었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캠페인도 함께 벌였다.
그렇지만 이 보도는 이후 벌어진 일련의 영화 같은 현실로 하나하나 거짓임이 밝혀졌다. 먼저 북한은 탈북했던 유태준이 마음이 변해서 북한으로 다시 귀환했다고 보도했으며, 유태준의 육성 기자회견을 내보냈다. 당황한 는 유태준과 함께 탈북해 서울에 살던 그의 어머니를 통해 ‘아들 목소리 아니다’라는 기사를 게재한다. 그렇지만 두 달 뒤 문화방송이 그의 기자회견 내용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입수해 남쪽에 있는 가족들에게 확인시킴으로써 그의 생존이 사실로 판명됐다. 더욱 영화 같은 내용은 유태준이 재탈북에 성공해 서울로 돌아온 사건이다. 처형당했다던 탈북자가 다시 자기 발로 북한을 탈출한 구체적인 과정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가 2004년 7월 교보문고 앞에서 “나와 아들을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 품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손팻말을 들고 1인시위를 벌인 후일담은 씁쓸하기조차 하다.
북한 관련 언론 오보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기사들은 망명이나 숙청이다. 황당한 오보로 밝혀진 기사가 적지 않다. 이 1994년 8월 당시 핀란드 북한 대사였던 김평일이 망명했다고 보도했으나, 며칠 뒤 그가 직접 한국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오보로 밝혀졌다.
확인되지 않은 첩보들 다시 쏟아져2003년 5월 의 길재경 노동당 서기실 부부장 망명 보도 역시 다음날 가 애국 열사릉에 묻혀 있는 길재경의 묘비 사진을 보도함으로써 의 사과문으로 귀결됐다. 이 밖에도 2006년 9월 미 국무부 관료였던 로버트 칼린이 가상으로 쓴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편지가 ‘강석주 발언’으로 둔갑해서 보도된 사례도 있다. 강석주처럼 생각할 수 있는 칼린의 실력을 높이 평가해야 하지만, 북한 보도는 확인하지 않고 써 놓고 보는 한국 언론의 병폐를 확인한 사례였다.
최근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을 둘러싸고 첩보와 정보가 구별되지 않은 채 쏟아져나왔다. 정보 능력의 과시, 그래도 되나? 중국이나 미국이 진정 아무것도 몰라서 ‘확인된 정보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더욱 가관인 것은 급변 사태 논의다. 지도자의 사망을 국가 붕괴로 해석하는 것은 ‘보수적 기대’와 다름없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다양한 변수와 가능한 미래를 예측해볼 필요가 있다. 눈감고 허공에 팔을 휘젓는 과거의 모습이 재연되고 있다. 보수의 모자를 쓴 실력 없는 ‘올드 보이’들의 귀환인가? 앞으로 ‘화성침공’ 같은 가상체험을 몇 번 더 경험해야 할 듯하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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