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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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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건네는 질문

등록 2011-03-25 07:16 수정 2020-05-02 19:26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전화로 듣게 될 때, 나이가 드는 걸 깨달았다. 몇 년 전 친한 후배가 죽었다. 얼떨떨했다. 전화를 걸어 넋두리를 늘어놓다가 “언니, 괜찮아”라는 말에 마음이 스르르 녹았는데, 그 이틀 뒤 후배의 죽음을 전화로 듣게 되었다. 곧장 병원으로 달려간 내게 누군가 조심스럽게 자살이라고 알려줬다. 한 해 지나 아빠가 간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시도할 수 있는 치료 방법이 없으니 서울로 가보라고 했다. 서울에서 석 달, 고향에서 한 달을 보내고 돌아가셨다. 심전도 검사기를 가로지르는 직선보다 빨리 찾아온 죽음은 직선이 멈추고 나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시간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그리고 발을 헛디뎌 물살에 휩쓸린 선배의 소식, 다시 이어지는 죽음의 소식들, 사람이 나이 든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죽음을 껴안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픽/ 장광석

그래픽/ 장광석

헝클어진 애도의 서랍

그 뒤로 세상의 죽음은 세 가지가 되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병으로 목숨이 사그라지는 것. 죽음을 선택한 의지를 슬픔으로 묻어버려서만은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남은 자들에게 고스란히 질문이 되어 돌아오는 그의 선택은 울다가 잊어버리고만 싶은 것이었다. 선택의 순간도 없이 죽음을 안겨버린 사고는 아무리 원인이 분명하더라도 왜 하필 그때 거기에서냐고 끊임없이 되물어야 했다. 누구나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기에, 죽음이 가까워지는 것을 미리 알고 준비할 시간이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일이다.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대출받은, 언제 차압당할지 모르는 시간을 유쾌한 선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니 몇 가지이든 그것은 결국 죽음이다. 어설프게라도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서랍’을 준비한 건 죽음만큼 애도에도 익숙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면서 평온하게 떠나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죽음의 순간은 철저하게 사적이다. 누구에게도 보이거나 들릴 수 없는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떠나보내도 되는 건지 자꾸 자신이 없어지고, 서랍은 이내 헝클어지고 말았다.

지난 주말부터 죽음의 소식들이 쏟아져나왔다. 일본 대지진으로 생존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벌써 1만 명이 넘었고, 이 글이 인쇄돼 나갈 때쯤 더욱 많은 사망자 수가 집계될 것이다. 수백, 수천의 이야기를 가진 수만 명의 사람, 그러나 다 알 수 없는 이야기들. 솔직히 나는 이런 죽음을 온전히 애도할 자신이 없다. 슬퍼하다가 언젠가 잊게 되리라. 2년 전 주민등록번호에 지장까지 찍은 글을 뒤로하고 목숨을 끊은 여성 연예인도, 닫힌 직장 문 밖에서 하나둘 죽어간 노동자도, 기숙사에서 몸을 던진 노동자도, 이유도 모른 채 생매장당한 생명도, 나는 언젠가 잊게 될 것이다. 죽음 뒤에야 건네지는 질문들의 답은 그들에게 들을 수 없다. 미안함, 고마움, 위로, 격려, 무엇을 어떻게 전하며 그들을 떠나보내야 할지, 그래서 지금 애도의 자리가 간절하다.

미안함을 고백하자

일본 대지진이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것은 단지 인도네시아나 아이티, 리비아보다 가까운 나라고, 인류 역사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재앙이라는 이유만이 아닐 게다. 원전 폭발과 방사능 유출로 죽음이 내 문턱 앞까지 왔다는 불안이 있을 터다. 애도도 어차피 산 자를 위한 것이지만 지금의 혼란이 산 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면 좋겠다. 차분히 죽은 이들이 건네는 질문을 헤아릴 수 있는 공적인 자리가 필요하다. 죽음이 건네는 질문은, 대답뿐만 아니라 질문도 산 자의 몫이다. 천재(天災) 뒤로 숨은 인재(人災)를 헤아리고, 자살 안에 숨은 타살을 헤아려, 안타까움 뒤로 숨으려는 미안함을 고백해야 한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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