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특집 > 초점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4년07월08일 제517호
전향제가 짓밟은 사람들

▣ 이지은 기자/ 한겨레 사회부 jieuny@hani.co.kr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의문사 인정 결정을 내린 비전향 장기수 3명 가운데 최석기(당시 42)·박융서(당시 53)씨는 1950년대 초반에 남파된 간첩이고, 손윤규(당시 53)씨는 한국전쟁 때 지리산에서 활동한 빨치산 출신이다.

최씨는 1948년 월북했다 53년 전남 보성군 벌교 방면으로 침투했지만, 남한에 온 지 1년여 만에 붙잡혔다. 그는 55년 광주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된 뒤 74년 대전교도소에서 숨졌다. 당시 사망기록엔 ‘심장마비’로 적혀 있지만, 의문사위 조사 결과 경찰이 동원한 폭력범죄 재소자 2명한테 맞아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박씨는 1957년 경기 연천군 신탄리로 침투한 간첩으로 서울로 들어오다 검거됐다. 그는 경찰에 협조도 했지만, 58년 남북 관계가 악화되면서 재판에 넘겨져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박씨 역시 대전교도소에서 전향 공작 전담반에게 온몸을 바늘로 찔리는 고문을 당한 뒤 “전향을 강요 말라”는 혈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빨치산 출신인 손씨는 1955년 자수했다. 하지만 군법회의에 회부돼 사형을 선고받고 60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은 뒤 대구교도소에서 복역했다. 그는 한때 전향서를 내기도 했으나, 76년 강제 전향 방식에 항의하는 단식투쟁을 하다 고무호스를 위에 넣어 음식물을 투입하는 강제급식 과정에서 숨졌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사상전향제도는 1933년 조선총독부가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법당국통첩’을 뿌리로 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적용돼온 이 제도는 73년 8월 ‘전향공작 전담반’이 만들어지면서 극에 달했다. 51~55년 구속된 상당수 좌익들이 만기 출소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박정희 정권은 75년 ‘사회안전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 법에 의해 이미 출소한 150여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보안감호 처분을 받고 다시 옥에 갇혔다.

사회안전법은 89년 폐지됐고, 사상전향제도 역시 98년 폐지됐다. 또 사상전향제도를 대체한 준법서약제도도 2003년 폐지됐다. 하지만 출소한 비전향 장기수들은 지금도 ‘보안관찰법’에 의해 자신의 일상을 신고할 의무를 강제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