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2 ] 2003년12월03일 제487호 

“여기서 주검을 뜯기도 했지…”

‘실미도 사건’ 당시 소대장과 함께 찾아본 남북 분단 비극의 처참한 현장

‘실미도 사건’ 당시 우연히 외박을 나와 참화를 면한 소대장과 함께 냉전의 참혹한 비극의 현장을 찾았다. 무덤을 파헤쳐 주검을 ‘입에 댔던’ 끔찍한 현장. 주민들도 숨 못 쉬고 살았던 나날들.

실미도는 너무 가까웠다.

무시무시한 사건의 현장이 서울에서 한 시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은 조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11월26일 오전 <한겨레21> 취재진이 서울 마포를 벗어나 자유로를 달리다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인천광역시 중구 잠진포구에 닿았다. 잠진포구에서 실미도의 엄마섬인 무의도까지는 배로 5분 거리였다. 남북 분단의 비극이 가장 압축적이고도 상징적으로 남아 있는 현장을 가본다는 감상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사진/ 무의도에서 바라본 실미도 전경.(김진수 기자)

우연한 외박으로 목숨을 건졌다

사실 실미도가 수도권 북쪽, 특히 서울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까워진 것은 순전히 인천국제공항 때문이다. 예전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하루에 한두번 여객선을 타고 1시간 남짓 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공항건설 공사로 영종도와 용유도가 메워져 영종대교로 육지와 이어지는 바람에 무의도와 그 부속섬인 실미도에 가는 시간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실미도 현장을 함께 찾아보기로 약속한 김방일(59·당시 실미도 부대 소대장)씨는 충북 청주에서 아침 일찍 올라오느라 밤잠까지 설쳤다면서 반갑게 취재진을 맞았다. 김씨는 1971년 8월23일 일요일 새벽 6시부터 시작된 바로 그 ‘실미도 사건’ 당시 3명의 부사관 소대장 가운데 한명으로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했다. 당시 24명의 생존 훈련병들(31명 가운데 7명은 훈련과정에서 사망)은 서울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들의 훈련과 부대 경비 등을 담당했던 기간병(군복무로 이곳에 배치된 현역병)과 간부 등 24명 가운데 12명을 사살했다. 6명은 바다로 피하려다 익사했다. 훈련병 한명도 이 자리에서 사망했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경비병 5명과 김씨 등 모두 6명뿐이었다.


사진/ 1971년 사건이 시작됐던 현장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김방일씨.(김진수 기자)


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 당시 약혼녀였던 아내 김명애(57)씨가 마침 “집안의 친척들이 인천에 와 계시니 만나보고 들어가라”는 연락을 김씨에게 했고, 이를 전해들은 교육대장이 “내일이 일요일이니 외박하고 오라”고 지시한 덕분에 사건 당일 아침에는 섬 밖에 있게 되었다. 김씨와 헤어져 혼자 실미도로 들어간 교육대장은 다음날 아침 훈련병들에 의해 첫 희생자가 됐다. 김씨는 다른 기간병들과 달리 실미도 부대의 창설 때부터 사건이 터지고 부대가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모든 기간을 훈련병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 몇 안 되는 인물로 이 사건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이름나 있다.

잠진포구에서 무의도로 건너가는 배 위에서 김씨는 “이제는 실미도를 찾아도 별로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그는 1999년 문화방송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이 사건을 처음 본격적으로 다뤘을 때를 기억하면서 “그때만 해도 28년 만에 실미도에 처음 들어왔던 것인데 위령제를 지내다보니 옛날 생각이 나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1999년 이후 그는 이곳을 5, 6번 찾았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 자신이 겪었던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리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12월 중순께 개봉할 영화 <실미도>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한평생 가슴에 품고 살려고 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래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스트레스를 주고 내 인생 전체를 짓눌렀는데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알고 있고, 영화까지 개봉된다고 하니 가슴이 다 후련하다.” 그러면서 그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재미있는 오락으로 보지 말고 역사를 되돌아본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밝혔다.


사진/ 막사 근처에 남아 있는 훈련병들의 훈련장소.(김진수 기자)


실전훈련은 무의도에서

무의도(舞衣島)는 인천쪽에서 보면 고깔을 쓴 무당이 춤을 추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이다. 무의도는 자연산 굴과 숭어, 망둥어, 노래미, 도다리 등으로 이름난 곳으로 최근에는 서울쪽에서 오는 관광객들이 늘어나 섬 곳곳에서 숙박시설 신축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무의도는 실미도와 한 몸이다. 썰물 때면 무의도와 실미도를 나누던 바닷물이 빠지고 엄마가 아이를 껴안듯 두 섬은 한 몸이 되고, 사람들은 실미도쪽으로 건너갈 수 있다. 무의도에 내린 취재차량이 섬을 관통해 실미도쪽 해안에 이르자 2km가 넘는 실미해변이 눈앞에 펼쳐졌다. 총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라고 상상하기에는 풍광이 너무 아름다웠다. 갯벌에서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여성 몇명이 굴을 따고 있었다.

흔히 이 사건과 관련해 무인도인 실미도에 부대 막사가 세워졌기 때문에 모든 훈련이 실미도에서 이뤄진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사실 훈련의 절반 이상은 실미도보다 산악지형이 험한 무의도에서 이뤄졌다고 김씨는 말했다. 그는 “실미도에서는 유격과 사격훈련 등 기본훈련이 이뤄졌고, 본격적인 산악훈련, 침투·폭파 훈련 등은 대부분 무의도에서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이 훈련 때문에 받았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갯벌을 건너기 시작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실미도에 도착했다. 실미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곳에 다다르자 조그만 오솔길이 나왔고, 그 오솔길은 바로 실미도 부대 막사가 있던 곳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실미도 부대 막사가 있던 곳은 천혜의 요새였다. 육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움푹 팬 지형 때문에 바다쪽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은 위치였다.


△ 1971년 8월23일 사건 당일 훈련병들의 탈출 경로.

막사 근처를 둘러보다 3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직접 증거’가 눈앞에 나타났다. 당시 훈련병들이 평양 시내로 진격해 들어갈 것에 대비해 위성사진을 토대로 평양 근처 산악지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시멘트 조형물을 발견한 것이다. 몇개로 조각이 나 있었지만 산악지대의 모양새는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해 1월 일어난 김신조 사건 때문에 4월에 창설된 우리 부대에는 9월까지 김일성을 사살하라는 목표가 있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훈련을 했다. 어떻게 저런 초인간적인 힘이 나올까 할 정도의 훈련이 이어졌다.”

“소대장님, 죄송합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라고 묻자, 김씨는 “사람이 도망갈 때 평상시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높이도 훌쩍 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런 것이다. 돌아보면 어떻게 내가 저것을 했을까 할 정도의 훈련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소개한 일화들 가운데는 끔찍하다못해 엽기적인 것까지 포함돼 있다. 담력을 키워주기 위해 김씨는 훈련병들과 함께 연고가 없는 묘지에 가서 땅을 파고 관을 꺼내 해골과 뼈를 추리는 과정에서 그 일부를 ‘입에 댔다’고 했다. 훈련병들에게 시키려면 자신도 똑같이 행동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 작업은 부대의 상징물을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다. 해골과 뼈를 나무판에 붙이고 그 밑에 ‘우리의 신조’라는 글씨를 새겨놓은 것이 부대의 비공식 상징이었다.

막사가 있던 곳 바로 아래에는 당시에도 사용했던 우물이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아직도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씨는 “70여명 가까운 인원이 매일 마시고 샤워까지 했을 정도로 물이 풍부했는데, 섬에서 이렇게 물이 많이 나오는 곳은 거의 없다고 들었다”고 기억했다.

김씨는 사건의 내용과 관련해 잘못 알려진 일들이 많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훈련병들이 모두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재소자들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과자들도 있었지만, 사형 선고나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 중인 그런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지역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보통 폭력 전과 정도는 있는 것 아닌가. 오히려 가족 등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어서 이런 일을 맡길 수 없다.”


사진/ 실미도 부대의 기간병들 모습. 왼쪽에 보이는 것은 실제 해골과 뼈로 만든 부대의 상징물이다(왼쪽). 영화 <실미도> 포스터(오른쪽).

그는 사고를 수습하러 들어간 막사 현장에서 훈련병들이 기간병들을 숨지게 한 뒤 자신에게 남긴 “소대장님,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는 메모의 내용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래도 더 불쌍하고 안 된 사람들이 훈련병들”이라는 것이다. 희생된 기간병들은 국립 현충원에 묻히고 국가에서 보상도 이뤄졌지만, 사망한 훈련병들은 신상공개는 물론이고 어디에 어떻게 매장됐는지도 밝혀진 바 없다. 훈련병들은 민간인 신분을 유지했기 때문에 당시나 지금이나 군인으로 취급하지 않는 게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주민들 “포로수용소가 따로 없었다”

밀물이 몰려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실미도를 떠나 무의도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실미도 사건의 감추어진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식당을 운영하는 김아무개씨는 “한마디로 숨도 못 쉬고 살았다”고 잘라 말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는 ㅅ씨 역시 “그때는 섬 전체가 독재 치하였다”고 혀를 내둘렀다. “사실은 아직도 무섭다. 그래서 일부 주민들은 쉬쉬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굴을 채취하는 생업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밤마다 북한 군가 부르면서 공포탄을 쏴대고 하는 바람에 잠을 못 자고 지샌 경우도 많았다. 나는 군화발에 맞아서 턱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포로수용소보다 더한 무서움에 떨면서 살았다. 국가에서 무의도 주민들한테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한다.”

7살짜리 남자아이가 기간병의 총에 맞아 숨졌다는 얘기를 전해주는 주민들도 있었다. 실미도에는 부대가 생길 당시 한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기간병이 권총으로 아이를 쏴 숨지는 사건이 벌어진 뒤 이사를 가 무인도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과 관련해 주민들의 피해가 정면으로 부각돼 논의된 바는 전혀 없다. 실미도 사건에서도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이라는 ‘과거청산’ 사건의 전형적인 과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사고가 터지기는 했지만, 그렇게 끝나지 않고 우리가 실제로 평양시내에 가서 쑥대밭을 만들었다면 전쟁이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민족 전체가 참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자다가 깜짝 놀란다.” 무의도를 빠져나와 고향인 청주로 떠나면서 김씨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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