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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도 못하는 나라! 21세기 대한민국의 수준을 일깨워준 이라크 파병조사 부실논란
임진왜란을 2년 앞둔 1590년 조선은 첨지 황윤길을 정사(正使)로, 사성(司成) 김성일을 부사(副使)로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했다. 귀국 뒤 황윤길은 임금인 선조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안광이 빛나며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 했고, 김성일은 “히데요시란 인물은 두려워할 인물이 족히 되지 못한다”고 보고했다. 많은 사람들은 당시 서인이던 황윤길과 동인이던 김성일의 당파적 이해관계 때문에 엇갈린 보고를 하는 바람에 조선이 국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선조실록>과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 따르면,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만약 병화가 있으면 어찌 하려고 그러는가” 하고 물었다. 김성일은 “저도 어찌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단정했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고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400여년 전 임진왜란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 안보 현안과 관련된 현지조사는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수도 있다.
국방부와 박건영 교수의 충돌
“정책과 정보는 공유할수록 힘이 커진다.” 시민단체나 학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최근 국방부 정책 당국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한 대학교수는 “올 들어 국방부 당국자들은 한-미 동맹 같은 현안을 안보 전문가들에게 설명하는 자리에서 이같이 강조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최근 이라크 현지 정보합동조사단의 ‘부실조사’ 논란은 시민사회와 국방 당국이 정책 공유는커녕 정보 공유도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강대영 이라크 정부합동조사단장(육군 준장)은 10월6일 국방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라크 상황이 전반적으로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히고, 파병할 경우 한국군 주둔예상지역인 이라크 북부 모술지역은 안정이 유지되고 있고 테러의 위험성은 점차 감소 추세라고 주장했다. 강 단장의 설명이 끝나자 조사단원으로 기자회견에 참여한 박건영 가톨릭대학교 교수는 모술 지역 조사는 미군으로부터 브리핑 받는 시간을 빼면 약 45분밖에 하지 않았으며 조사에 근복적인 제약이 있어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부실조사 논란이 일자 국방부는 다음날 7일 오전 다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강대영 단장은 논란이 된 모술지역 조사 시간은 45분이 아니라 모두 6시간이며, 현지조사단과 별도로 ‘사전동향조사팀’을 이라크 북부지역에 보내 현지 정세를 파악했다고 밝혔다. 강 단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박 교수가 청와대에 낸 개인보고서 전문을 갑자기 공개해버렸다. 군 관계자는 “박 교수가 마치 파병 반대 주장을 편 것으로 알려졌지만 박 교수 보고서의 실제 내용은 이와 달랐다”고 말했다. 박 교수 보고서에는 △파병 결정시 모술이 최적 지역임 △내년 2월 말 3월 초 미 제101 공중강습사단 귀국 시간표에 맞춰 병력이 전개되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음 △파병군 규모는 자율적 작전 통제가 가능한 폴란드 사단의 형식과 규모가 바람직하다 등 파병 결정시 대처방법이 담겨 있다. 국방부는 박 교수가 보고서에서 파병의 필요성을 인정해놓고 언론에는 부실조사를 지적하는 ‘표리부동’을 공격한 것이다.
9박10일 동안 무엇을 한 것인가
하지만 박건영 교수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논란이 된 보고서 특정 부분을 공개하는 줄 알았지 전문 공개는 전혀 몰랐고 동의한 바도 없다. 이라크 현지조사의 목적이 정책 결정의 합리성·현장성을 확보하는 데 있으므로, 보고서 목적도 파병 여부에 대한 개인 의견을 밝히는 것보다는 정책 결정 각 과정에서 숙고돼야 할 문제와 정책 결정 과정에 따라 발생이 예상되는 도전과 대처방법 등을 제시하는 데 뒀다.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심정으로 쓴 보고서의 전문을 동의도 없이 공개한 것은 국익에 도움되지 않는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실제 박 교수는 보고서에서 파병 결정시 고려사항과 대처방법뿐만 아니라 불파병 결정시 고려사항과 대처방법도 아울러 상세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국방부와 박건영 교수의 충돌이 아니라 국방부·외교부 당국자 11명이 포함된 정부합동조사단이 9박10일 동안 현지조사를 벌이고도 중요한 국가정책 결정의 기초 판단자료를 수집·분석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통합신당의 김성호 의원은 “한마디로 부실 보고서를 넘어 엉터리 보고서다. 현지조사를 위한 대상 선정부터 조사과정, 분석내용 등 모든 것이 정부 차원의 조사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엉성하다. 상식적으로 객관성을 담기 위해서는 최소한 미군 사령부, 이라크 주민 대표, 유엔 연락사무소의 의견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조사단은 미군쪽 입장만 듣고 왔다. 이번 이라크 현지 정부합동조사단이 단순히 세금을 낭비했다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국가정책 결정의 판단 기준이 되는 사실관계를 왜곡시켰다는 더 큰 의혹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이라크 현지조사를 벌인 장영달 국회 국방위원장은 인터넷언론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게릴라전 상황하에서 단기간 조사는 큰 의미가 없다. 이라크는 전쟁이 끝났지만 게릴라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사흘 동안 특정 지역 사정이 안정됐다 나흘 만에 교전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인데, 며칠 조사해서 현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정부 차원의 객관적 현지조사가 어려운 한 요인으로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의 말처럼 ‘파병문제를 담당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국방·외교쪽의 시각 편향’을 지적할 수 있다.
이왕 보낼거면 빨리 보내자?
한 국방부 장성은 ‘미군 자료에만 의존해 정부합동조사단의 조사가 부실하다’는 비판에 “이라크 북부에 유엔조직이나 이라크 자체 행정기관도 없는 상황에서 미군이 제공한 자료가 가장 믿을 만했다. 이보다 더 정확한 자료는 없다”고 말했다. 군 내부에서는 이왕 전투병을 보낼 거면 화끈하게 많이 빨리 보내야 한다는 분위기도 있다. 일부 군 관계자는 파병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이라크에서 가장 정확한 임무수행 능력을 갖고 있다’며 때이른 파병부대 선정 로비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일보> 10월9일치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이라크 전투병 파견시 우리쪽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1만명이 넘는 한국군 사단 규모를 파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고 보도했다. 청와대는 바로 사실무근이라고 공식 부인했지만, 외교안보 고위 당국자들 중에는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파병할 경우 독자적인 작전수행과 방어능력을 갖춘 충분한 병력의 부대를 보내야 아군 희생자를 최소화할 수 있다. 파병반대론자들이 인명 희생을 가장 걱정하는데,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1만명 넘는 사단 규모 정예병력을 보내야 한다. 폴란드 사단처럼 우리가 사단지휘부를 맡고 외국군을 받아들일 경우 이들의 훈련 수준이나 전투력을 보장할 수 없다. 우리는 전투병력뿐만 아니라 공병이나 의무부대를 많이 보내 집·학교·병원·도로 등을 건설하는 등 ‘한국은 이라크의 친구’란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 이러면 장기적으로 에너지 안보나 중동지역 진출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라크 부실조사 논란의 본질은 ‘모술 조사 시간이 45분이냐 6시간이냐’가 아니라 한국 외교안보정책 결정 과정의 비합리성과 폐쇄적 관료주의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라크 합동정부조사단은 자신의 눈과 머리로 세계 정세를 판단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21세기 대한민국의 수준을 일깨워준 셈이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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