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1일 미국 워싱턴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에선 한-미 동맹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열렸다. 돈 오버도퍼 존스홉킨스대 선임연구원, 커트 캠벨 전 국무부 차관보, 조엘 위트 CSIS 선임연구원 등 쟁쟁한 한반도 전문가들이 주제발표자로 나왔다.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한-미 동맹이 주제였지만, 청중들의 관심은 단연 한국의 이라크 추가 파병 문제에 쏠렸다. 한 미국인이 질문을 던졌다. “한국이 이라크에 파병을 할 때와 파병을 하지 않을 때, 한-미 동맹엔 어떤 영향이 있는가.”

커트 캠벨 전 국무부 차관보가 먼저 답변했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워싱턴의 강한 압력을 느끼고 있을 것”라는 말로 운을 뗐다. 그의 다음 언급은 귀를 솔깃하게 했다. “주한미군을 이라크 주둔 미군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보내는 것은 근본적인 이슈로 한국 정부에겐 큰 곤경이 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지 (이를 피하기 위해) 보상해야 할 것이다.” 한국이 미국의 압력을 거부하긴 어려울 것이란 얘기다. 마이클 맥드빗 전략연구센터 소장의 얘기는 더 솔직했다.

사진/ 부시 대통령(왼쪽,GAMMA)과 웨슬리 클라크 민주당 경선후보(오른쪽,SYGMA). 미군의 추가파병을 피하려는 건 여야 모두 똑같다.

부시 재선 가도에 어두운 그림자

그는 “한국전쟁 때 한국은 미국의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많은 미국인들은 한국이 어떤 조처(파병)를 취하지 않으면 매우 거북한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1주일 뒤인 8일, 이번엔 워싱턴의 대표적 싱크탱크 중 하나인 헤리티지재단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비슷한 언급이 나왔다. 조지타운대 빅터 차 교수는 “만일 한국이 이라크에 파병하지 않으면 많은 미국사람이 미사일 방어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지난해 12월의 반미 시위 등의 문제에서 한국 정부가 미국에 협조하지 않은 점과 파병을 결부할 것”이라며 “결과적으로 한국에 대한 평가가 크게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다”고 말했다.

두 세미나 참석자들은 모두 워싱턴에선 한국을 잘 안다는, 이른바 ‘지한파’들이다. 세미나장의 분위기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논란을 바라보는 워싱턴의 시각을 잘 드러낸다. 진보적인 인사들까지도 이 문제가 나오면 “한국이 파병하는 건 한국으로서도 좋고 미국으로서도 좋은 일이다. 왜 고민을 하는가”라는 얘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조지 부시 행정부에 매우 비판적인 피터 벡 워싱턴한국경제연구소 연구실장의 의견도 비슷하다. 그는 민주당 경선에서 하워드 딘을 지지할 정도로 진보적이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전은 물론 잘못이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은 이라크를 재건해야 하며 한국이 여기에 참여하는 건 명분이 있는 일이다. 더구나 북한 문제를 생각해서라도 한국은 어렵지만 파병을 하는 게 훨씬 낫다”고 그는 말했다.

지금 워싱턴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정책은 어느새 동네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의 실책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외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강하게 바라는, 어찌 보면 좀 이율배반적인 분위기가 또한 워싱턴을 덮고 있다.

이는 어떻게든 빨리 이라크에서 발을 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사회 전반에 넓게 퍼지고 있는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미국 방송들은 거의 매일 속보로 이라크에서 미군이 숨지거나 다쳤다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이라크에 배치된, 우리로 치면 예비군에 해당하는 2만명의 주방위군과 예비군의 이라크 근무기간을 6개월에서 1년으로 늘리겠다는 국방부 발표에 이들 예비군 가족들은 분노하고 있다. 두 아들을 이라크 전장에 보냈다는 래리 시버슨은 <뉴욕타임스> 전면광고에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내 아들과 미국민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젠 그가 물러날 때다”라고 부시 행정부를 비난했다.

사진/ 이라크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고 숨진 동료들의 주검을 수습하는 미군들. ‘이라크 침공 지지’는 이제 불명예스런 족쇄가 됐다.(AP연합)

이라크 침공을 전후해 80% 가까이 치솟았던 부시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이젠 50%에도 못 미치는, 집권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이라크 승전 선언(5월1일)을 한 지 불과 다섯달 만의 일이다. 이라크 문제는 그의 재선 가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올 초만 해도 그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던 민주당 인사들은 이젠 그의 잘못을 비판하느라 여념이 없다. 한때 미국적 애국심의 전형으로 여겨졌던 ‘이라크 침공 지지’는 이젠 불명예스런 족쇄가 됐다.

민주당은 “유엔에 더 많은 권한을”

지난 9일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 토론회. 초점은 역시 이라크 문제였다. 그러나 전후 이라크 정책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느냐는 정책 토론은 아니었다. 지난달 민주당 경선에 뛰어든 뒤 곧바로 지지율 1위로 뛰어오른 웨슬리 클라크 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사령관의 말바꾸기가 핵심이었다. 거의 모든 후보들이 “클라크는 지난해엔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계획에 찬성하라고 의회 의원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 와선 이라크 침공이 잘못됐다고 비판하고 있다”고 클라크를 몰아붙였다. 클라크는 오히려 “(내가 의원이었다면)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역공을 취했다. 부시에게 무제한적인 전쟁권한을 준 의회 표결에 참여했던 의원 출신 후보들(조지프 리버먼·존 케리·존 에드워드 상원의원, 리처드 게파트 하원의원 등)을 겨냥한 것이다. 하워드 딘 전 버몬트 주지사는 자신과 다른 후보들과의 차이점에 대한 질문을 받고 가장 먼저 “나는 이라크 침공에 시종일관 반대했다”는 것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들 모두 미군의 추가 파병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가장 진보적이라는 하워드 딘조차 “외국군 4만~5만명 정도가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점에선 어떻게든 미군의 추가파병을 피하려는 부시 대통령과 의견이 똑같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의 주도권을 유지한 채 외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원하는 반면, 민주당 후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엔에 더 많은 권한을 넘길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게 다르다.

이런 와중에서 존 매케인 상원의원(공화)의 “미군을 더 투입해서라도 이라크 상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신선하게 들릴 정도다. 누구도 결자해지의 차원에서 미군을 더 이라크로 보내자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게 지금의 미국 정치권 분위기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바로 내년 11월의 대선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파병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통과는 아직 불투명하다. 이라크 재건 과정에서 유엔의 역할을 확대하고 이라크 주권이양 기간을 단축하라는 프랑스 러시아 등의 주장을 미국이 거부한 탓이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조차 지난 2일 “미국의 결의안은 명백히 내가 권고했던 방향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부시 행정부 내에선, 통과되더라도 상처투성이가 될 유엔 결의안을 아예 포기하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다. 그렇게 되면 한국 등의 이라크 추가파병은 국내 반대여론을 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게 분명하다. 또 오는 23일로 예정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이라크 지원국 회의에서 재건 지원기금을 모금하기도 훨씬 어려워진다. 미국이 내심 기대했던 ‘100억달러 모금’이 가능하리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지난 9일부터 이라크 정책에 대한 국내 지지를 끌어올리기 위한 새로운 캠페인에 돌입했다. 9일과 10일 이틀 동안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일제히 대중연설에 나서 “이라크 문제는 ‘테러와의 전쟁’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스콧 매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은 이에 대해 “우리의 이런 노력은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다. 미국민들에게 우리의 이라크 정책과, 이 정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리기 위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이 내용을 전하는 <워싱턴포스트>의 기사 제목은 “이라크 정책에 대한 대중적 열정은 점점 사그라지고 있다”였다. 그 열정을 다시 지피기엔 모든 게 다 역부족인 것 같다.

워싱턴= 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