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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 있음, 파격 아님! 영화감독 출신 이창동 문화부 장관, 이장 출신 김두관 행자부 장관을 말한다
독일 외무부 장관 요시카 피셔는 노숙자와 택시 운전사를 거쳐 정치판에 뛰어들었지만 장관이 되기 이전에 외교 경험은 없었다. 그는 지금 독일에서 가장 성공적인 장관으로 평가받는다. 프랑스 국방장관 미셸 알리오마리는 군 경험이 없는 여성이며, 직전의 알랭 리샤르 국방장관도 국방분야 경험이 없는 예산기획통이었다. 이에 비추면 이장과 군수 출신의 행정자치부 장관이나 소설가와 영화감독 이력을 지닌 문화관광부 장관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파격이 아니라 그걸 파격적이라고 보는 시각이 타성에 젖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수십년간 보아온 장관 인사관행과 달라서 낯이 선 까닭일까. 이번 인사가 파격이 아니라면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문화계의 팔방미인, 이창동
이 장관은 어린시절엔 그림에도 재주가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엔 옆 친구의 크레파스를 빌려 그림을 그렸지만,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물감 살 돈이 없어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는 게 그의 회고다. 어느 글에서 그는 “글을 쓸 때는 한번도 즐겁지 않았지만 그림 그릴 때는 늘 즐거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가끔 만화도 그렸고, 요즘에도 ‘장난삼아’ 만화를 그린다. 고교시절부터 문학소년이던 그는 경북대 국어교육과를 다니다 경찰에 붙들려가 밤새도록 얻어맞는다. 졸업한 뒤엔 서울 신일고교에서 국어교사를 한다. 이 무렵 첫아이를 교통사고로 잃어 힘겨운 시절을 보냈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전리>가 가작으로 당선돼 등단했다. 이후 분단소설의 수작으로 꼽히는 <소지>, 소시민의 삶에서 희망의 씨앗을 찾아낸 <녹천에는 똥이 많다> <운명에 관하여> 등 메시지 뚜렷하고 사회성 짙은 소설로 이상문학상과 한국일보문학상을 휩쓸었다. 국어교사 시절 과천에 살던 그는 시인 홍영철씨 등과 어울리며 동숭동 대학로에 뻔질나게 들락거린다. 홍씨는 ‘자기 주장이 뚜렷하지만 모난 데가 없고 바른 사람’이라고 이 장관을 기억했다. 이때 명계남씨와 알게 됐고, 이 인연은 1996년 이스트필름 설립으로 이어진다. 원래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지만 소설가 명함을 내던지고 충무로판에 발을 디딘 직접적 계기는 “무작정 유럽여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낭트 영화제에서 이란과 인도 등 세계 여러 나라의 영화를 보고 나서”였다. 뒤늦게 영화공부를 위해 프랑스 유학을 계획했다가 먼저 현장경험을 쌓으라는 박광수 감독의 조언에 따라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의 각본과 조감독을 맡는다. 1995년엔 박 감독의 작품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다. 영화계 입문 이후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로 이어진 그의 빛나는 성취는 익히 알려진 대로다. 1998년엔 스크린쿼터범영화인비상대책위원회 정책대변인을 맡아 활동했고, 세계무역기구(WTO) 문화 양허안 제출에도 반대했다. 장관 하마평에 오를 때부터 고사한 그는 “나로선 별로 안 좋은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누군가 쓴잔을 받아야 한다면 피하기만 하는 게 온당치는 않다고 생각했다”고 장관직 수락 경위를 밝혔다. 대학 때부터 사귄 부인 이정란(필명 ‘이란’)씨는 전주 출신으로, 인기 텔레비전 드라마 <고백>을 쓴 방송작가다. 이 부부가 다리를 놓아 결혼에 이른 ‘영호남 커플’이 또 있는데, 소설가 양귀자씨와 소설가이자 살림출판사 사장인 심만수씨 부부다. 이씨와 양씨는 원광대 국문학과 동창생이고, 이 장관과 심 사장은 대구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노무현의 행로 쏙 빼닮은 김두관
어린시절 그의 별명은 ‘주장’이었다. 공부는 빼어나지 않았지만 리더십이 강하고, 친구 사귀기를 좋아해 얻은 별명이었다. 남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민대 어문계열에 합격했으나 28만3천원이라는 등록금을 구하지 못해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2년 동안 시골에 눌러앉아 마늘 심고 모내기 하며 농사일에 종사한다. 그와 동생이 우여곡절 끝에나마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세형들 덕택이었다. 고등학교를 나온 큰형은 서독의 광부로 갔고,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둘째형은 남해의 논밭을 지켰으며, 중학교를 나온 셋째형은 기술을 배워 이라크 노동자로 일했다. 형들이 보내준 돈으로 아래 두 형제는 대학물을 먹을 수 있었다. 경북전문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동아대 정치외교학과에 편입한 두관은 의정부에서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 고려대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동생(김두수·현 민주당 당직자)의 영향을 받아 사회운동에 눈뜬다. 제대한 뒤 1년 남짓 서울에서 동생과 자취하며, 낮에는 <신동아>의 판촉요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민족학교에 다녔다. 1985년 민통련 사회부장으로 활동하며 청주지역 직선제 현판식을 주도했다가 3개월 동안 감옥생활도 경험한다. 이후 고향에 뿌리박기로 작정하고 남해로 돌아가 남해농민회를 조직해 사무국장으로 활동한다. 1988년 총선에서 ‘민중의당’으로 출마했으나 남해·하동 유권자 8만명 가운데 3천표를 얻는 데 그쳤다.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졌으나 고향 이어마을 주민들은 그를 이장으로 선출한다. 최초의 ‘행정 경험’을 행정계선의 최말단에서 경험한 셈이다. ‘책사랑나눔터’ 운영과 <남해신문> 창립(1989)은 그를 남해의 젊은 일꾼으로 부각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군민주 형식으로 공모하되 한 사람이 250만원 이상 출자하지 못하도록 한 <남해신문>은 지역주민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1995년 첫 지방단체장 선거는 그의 운명을 바꾼다. 37살, 전국 최연소 당선이었다. 남해군수 재직 7년 동안 숱한 일화를 남겼다. 지역언론의 병폐를 뿌리뽑기 위해 계도지 예산을 없앴고, 기자실을 폐쇄하는 과단성을 보였다. 장관이 된 이후 그의 개인 홈페이지(www.leader2002.co.kr)에 언론계에 몸담은 지 10년쯤 된다고 밝힌 인물이 ‘기자들과 술 마시지 말 것’ 등 ‘중앙언론 상대하는 방법’을 올려놔 관심을 끌고 있다. 아직도 김 장관을 ‘대언론투쟁’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이들이 많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화제가 많았다. 남해의 벚꽃축제를 홍보하기 위해 직접 남해대교에서 번지점프를 선보여 화제에 올랐고, “인사청탁을 하면 손해를 볼 것”이라고 공언한 뒤, 실제로 케이크에 돈을 넣어 보내온 승진대상 공무원의 승진을 유보시켰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검증된 인물’이라고 치켜세웠다. 이제 그가 노 대통령의 말을 확인시켜줄 차례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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