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4년09월01일 제525호
헌법은 ‘헌’법이 되고 있는가

국가보안법 합헌 판결을 계기로 되돌아보는 우리 헌법의 현주소… 시민을 위한 시민 주도의 개헌을 꿈꾸자


9 대 0으로 끝난 헌법재판소의 국가보안법 1조 합헌 판결에 대한 분노가 쏟아지고 있다. 이는 헌법에 대한 의문으로까지 이어진다. 헌법이 너무 ‘헌’ 법이 됐으므로 개헌 논의를 서두르자는 이야기 한편에선 헌법을 그대로 놔두되 법 해석을 진보적으로 하는 선에서 그치자는 주장이 맞선다. 과연 새 법은 필요한 것인가.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2004년 8월27일은 헌법 역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될지 모른다.


△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이날 헌법재판소에서 양심의 자유가 죽었고, 표현의 자유가 살해당했다. 헌재는 합헌 판결로 숨이 끊어져가던 국가보안법에 새 생명을 주었고, 병역거부자 처벌에 합헌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국가보안법폐지연대는 헌법재판소를 “국가안보재판소”라고 비판했고, 여호와의 증인인 성우 양지운씨는 “여론재판소”로 표현했다. 헌재의 ‘과감한’ 판결은 헌법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헌법이 죽은 문자에서 살아 있는 힘으로 바뀌고 있다. “억울하다고 하면 한대 맞고 법으로 따지면 한대 더 맞았던”(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시대에서 “억울하면 헌법에 호소하는 시대”(김두식 한동대 법대 교수)로 바뀐 것이다. 마침내 헌법의, 헌법에 의한, 헌법을 위한 시대가 열렸다.

헌법의 발견, 헌법의 복권!

헌법은 어느새 상하좌우를 막론하고 즐겨찾는 메뉴가 됐다. 정치권은 탄핵 사태를 통해 헌법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시민사회도 마찬가지다. 진보적 시민단체가 파병에 대해 위헌신청을 하면, 보수적인 시민운동은 헌재에 수도 이전의 위헌 여부를 묻는다. 시민은 헌재의 판결에 자극받고, 시민단체의 위헌소송으로 각성됐다. 시민의 나홀로 위헌소송도 드물지 않다. 바야흐로 헌법이 생활규범으로 복권되고 있다. 헌법의 발견 혹은 헌법의 복권이라고 부를 만한 현상이다. 헌법은 새 시대를 열기도 했다. 헌재가 전국구 제도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1인2표 비례대표제가 도입됐다. 비례대표제는 민주노동당의 국회 입성에 일등공신이었다. 군 가산점 위헌 판결은 성대결이라는 내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헌재의 권력이 무소불위로 치닫는 가운데 정작 헌법의 현실 적합성은 논외가 되고 있다.


△ 헌법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지만, 헌법재판소의 보수성은 쉽게 변하지 않고 있다. 국가보안법과 병역거부 합헌 판결을 하는 9인의 헌법재판관. (사진/ 류우종 기자)

현행 87년 헌법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87년 헌법은 시민혁명의 결과물이지만 시민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87년 민주화운동의 후예인 탄핵반대 집회 참석자들은 87년 헌법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아이러니에 처했다. 한국의 민주화는 흔히 ‘협약을 통한 민주화 이행’으로 불린다. 구세력의 퇴출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87년 헌법을 만들 당시 누가 대통령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든 정치세력은 의회 권력의 일부를 장악하는 것을 확신했다. 따라서 의회 권력을 강화하는 헌법 개정안에 합의했다. 게다가 강력한 대통령제를 견제하기 위해 의회 권력을 강화하는 한국 헌법의 특성도 반영됐다. 87년 이후 현재까지, 개혁(진보)과 수구(보수) 어느 쪽도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권력의 교착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그 교착상태를 87년 헌법이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수정당의 대통령이 거듭 등장하면서 정치 체제의 작동이 삐걱거렸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분단 등으로 인해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비대해진 의회 권한을 제약하는 개헌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두식 교수는 “헌법 개정 논의의 패러다임이 전환돼야 한다”며 “기본권 강화를 중심으로 한 ‘순수한’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헌법을 ‘민주적, 진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김종철 연세대 교수는 “어느 나라에도 이상적인 헌법은 없다”며 “헌법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 87년 헌법은 안정화 단계이고, 헌법의 부분적 결함보다 헌법의 안정성이 중요하다는 견해다. 장영수 고려대 법대 교수도 “기본권 보강보다 기본권 실현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헌법이 ‘헌’ 법이 됐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조국 교수는 헌법 전문부터 바꾸자고 제안했다. 조 교수는 “헌법 전문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민주적 기본질서’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자본주의로 왜곡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민주적 기본질서로 바꿈으로써 자유민주주의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까지 포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헌법의 ‘헌’ 조항들에 대한 개정 요구도 있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조항들


△ 1987년 6월항쟁의 후예들이 87년 헌법 체제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아이러니한 풍경이 연출됐다.
(사진/ 류우종 기자)

임지봉 건국대 법대 교수는 “헌법 10조의 행복추구권 조항이 너무 다의적이고 막연하다”고 지적했다. 다른 기본권의 확장을 제약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헌법 29조 2항의 이중배상금지 조항은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유린한 대표적인 독소조항이다. 이 조항은 군인, 군무원, 경찰공무원 등이 직무상 불법 행위로 인해 손해를 입어도 법률이 정하는 보상 이외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할 수 없도록 했다. 당초 국가배상법에 명시된 이중배상금지 조항은 71년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이중배상금지 조항을 헌법에 넣어버렸다.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의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였다. 임 교수는 “군인 등을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한 평등권 침해”라고 지적했다. 법관의 재판독점권을 규정한 27조 1항도 시민의 재판 참여를 봉쇄하는 조항으로 꼽힌다. 사법 개혁의 방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배심제와 참심제 도입의 걸림돌이다. 방탄국회로 악명 높은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44조)과 면책특권(45조)에도 예외 조항을 삽입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비리 혐의자에게 불체포특권을, 고의로 명예훼손을 했을 경우 면책특권을 박탈하자는 것이다.

인권의 관점에서 헌법을 새 법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참여연대 하승수 변호사는 “시민사회가 87년 민주헌법 쟁취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참여민주주의 헌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라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내실화’가 기본 방향”이라고 제시했다.

차별은 핵심적인 인권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헌법은 차별 금지에 무능하다. 특히 현행 헌법은 양성평등을 실현하기에 역부족이다. 현행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성별의 의하여 차별받지 아니하고(11조1항), 여성이 고용·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32조4항)’ 등 성차별금지 조항이 명시돼 있다. 하 변호사는 “‘부당한 차별’이 아닌 ‘정당한 차별’도 있느냐”며 “현재의 소극적 차별 금지로는 날로 세련화되는 ‘합리의 외피를 쓴 차별’을 금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를 헌법에 명시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헌법에 양성평등이 실현될 때까지 고용 등에서 여성을 우대하는 조항을 넣자는 제안이다. 캐나다 헌법 등에는 이미 적극적 우대조치 조항이 삽입돼 있다.

장애인 관련 조항도 시대에 뒤떨어진다. 헌법 34조 5항은 ‘신체장애자 및 질병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민의 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했다. 이 조항은 장애인을 권리를 가진 주체가 아니라 보호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김두식 교수는 “장애인의 인권에 대한 언급은 없고, 시혜적 복지의 대상으로만 보는 조항은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김 교수는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에서 일상생활의 차별로 인권 문제의 양상이 바뀌고 있다”며 “헌법에 장애인, 성소수자 등을 위한 차별금지 조항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혼인을 ‘양성의 평등에 기초한다’고 규정한 36조 1항도 동성결혼이 의제로 떠오를 경우, 논란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17조의 프라이버시권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구체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국가의 국민 사생활에 대한 통제와 감시가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프라이버시권을 더 강하게 명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임지봉 교수는 “사생활의 자유가 국방의 이익 혹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충돌할 경우, 어느 정도 제한될 수 있는지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위헌소송은 시민단체의 필수불가결한 운동이 됐다. 호주제 폐지 운동도 위헌소송을 진행 중이다. (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시민권 관련 조항의 현대화 요구도 있다. 일부에서는 선거 나이를 18살로 헌법에 못박자고 주장한다. 미국은 1971년 수정헌법 제26조를 만들면서 만 18살 이상의 선거권을 명시했다. 19조 양심의 자유 조항에 ‘사상의 자유’를 함께 명시하자는 주장도 있다. 조국 교수는 “양심의 자유가 외부로 표현되면 국가안보를 이유로 제한당해왔다”며 “양심의 자유를 완전하게 보장하기 위해 양심 실현의 자유까지 헌법에 명시하자”고 주장했다.

“사상의 자유를 명시하자”

독일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뿐 아니라 대체복무제를 헌법에 시민 권리로 명시하고 있다. 헌법의 지방자치 규정도 구닥다리다. 현재 지방의회의 자치입법권(조례제정권)은 “법령의 범위 내에서”만 인정된다고 헌법에 규정돼 있다. 심지어 법령뿐 아니라 시행규칙에 조례가 위배돼도 무효가 된다. 정부의 구닥다리 시행규칙 탓에 지방의회의 모범적인 조례 제정이 좌절되는 사례가 벌어지고 있다. 2002년 순천시의회가 만든 정보공개조례가 정보공개법 시행령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대법원에서 무표 판결을 받았다.

헌법의 경제 관련 조항은 ‘생각 밖으로’ 진보적이다. 헌법 119조 2항은 적정한 소득분배 유지,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 방지, 경제 민주화를 내용으로 국가의 개입을 인정하고 있다. 김종철 연세대 법대 교수는 “제헌 헌법부터 복지국가의 전통이 반영돼 있다”며 “사회국가, 경제 민주화 등이 그 흔적”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헌법을 ‘사회주의 헌법’이라고 공격한다. 하지만 헌법 해석의 보수성이 외양의 화려함을 가려왔다. 헌재는 토지공개념 위헌, 직권중재제도 합헌 등을 통해 ‘사유재산권’ 수호에 앞장서왔다. 민주노총 법률원 송영섭 변호사는 “헌법에 노동3권을 보장한 나라가 흔치 않다”면서도 “헌재의 해석이나 하위법을 통해 노동3권을 제약해왔다”고 지적했다. 송 변호사는 “헌법이 보장한 단체행동권을 하위법인 형법에서는 범죄 행위의 시각으로 접근한다”고 덧붙였다.


△ 정치적 외풍이 헌법을 흔드는 사이. 헌법은 영혼을 잃어버렸다. 휘날리는 헌법재판소 깃발. (사진/ 박항구 기자)

한국 사법부는 국제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 사법부의 헌법 해석에는 국가안보 우선, 국제법 무시의 유구한 ‘전통’이 자리잡고 있다. 헌법 6조에 따라 한국 정부가 가입한 국제인권규약과 국제법은 원칙적으로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 더구나 한국은 90년대 국제인권규약 등 주요 국제규약에 잇따라 가입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인권이 유보돼왔다. 지난달 대법원법은 병역거부 판결문에서 “병역거부권이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인권규약(B규약)에 명시된 양심의 자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넣어 시민사회를 아연케 했다. 대법원의 해석과 반대로 유엔인권위는 같은 조약에 근거해 병역거부권 보장과 대체복무제 도입 권고를 여러 차례 내린 바 있다. 하지만 현실은 변하고 있다. 앞으로는 유엔인권위 권고를 이용해 국내법을 고치는 사례가 생길 전망이다. 국가인권위는 2003년 12월 유엔인권협약 개인통보제도에 따른 국내국제절차마련 특별법 제정을 법무부에 권고했다. 법무부는 이 권고에 따라 법안을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법치사회는 불가피하지만 위험하다. 김종엽 교수는 “법이 아닌 형태로 현대사회를 통합할 방법이 없다”며 “헌법은 강제력과 규범적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지적했다. 현대사회는 서로 다투지만 결국 헌법에 승복하는 헌법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관의, 법관에 의한, 법관을 위한’ 사회는 위험하다. 법관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고, 심판받지 않는 권력이다. 자칫 대한민국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법관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법관으로부터 나온다’로 바뀔 지경이다. 지난 8월27일의 국가보안법 전원일치 합의 판결은 그 위험을 증명했다. 김종철 교수는 “아직은 이르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도 법치(법에 의한 지배)가 민주주의(다수에 의한 지배)와 충돌할 것을 염려했다. 그는 “정치권력이 비대할 때는 법적인 통제가 필요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사법에 의한 전제의 위험이 있다”며 “헌재가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재승 교수는 “유럽에서는 법치국가를 법관국가로 부르기도 한다”며 “헌재는 오로지 동성동본금혼 위헌, 군 가산점 위헌처럼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할 때만 유익하다”고 평가했다. 예컨대 수도 이전 문제에 문외한인 헌법재판관이 수도 이전 사안을 좌우하는 사회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사법개혁 없는 법치사회는 위험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은 법 해석의 독점권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사법개혁 없는 법치사회는 위험하다”며 “시민의 참여가 보장될 때 법치주의도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승수 변호사는 “최소한 대법관의 임명권 제청권을 대법원장이 행사하지 못하게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장의 임명제청권은 지나친 권한이라는 것이다. 하 변호사는 “헌법을 개정해 법률전문가가 아닌 균형 잡힌 시각의 지식인을 헌법 재판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행 헌법은 87년 6월항쟁의 결과물이지만, 여전히 시민헌법 풍토는 자리잡히지 않고 있다. 헌법을 피로 쓴 전통이 부족한 탓이다. 서구에서 헌법은 국가라는 괴물이 시민을 잡아먹으려는 것에 대항한 싸움의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은 시민이 만들지 않고, 국가가 베푼 시혜의 산물이다. 천부인권 사상도 수입품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법 관념에는 국가가 먼저 존재하고 시민이 나중에 위치한다. 이제는 시민이 주도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서야 마침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헌법이 탄생할 수 있다. 어떤 헌법을 만드느냐는 어떤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느냐와 직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