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4년09월01일 제525호
헌재가 잘해야 나라가 사는데…

정치적 편향성 비판받는 최고의 권력기관… 헌법을 국민의 칼로 거듭나게 한 공로는 인정할 만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는 1987년 ‘6월항쟁’의 산물이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 정치에 맞서 승리한 시민들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보호해줄 수 있는 헌재를 ‘전리품’ 중의 하나로 쟁취했다. 헌재는 공권력의 부당한 법 집행에 과감하게 철퇴를 내려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한 측면도 있지만, 국가보안법과 노동법 분야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고집해 진보 성향의 시민들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 헌재는 사실상 대법원 위의 상급심 구실을 하고 있지만, 헌재의 결정에 대해서는 상소나 항고 등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 (사진/ 박항구 기자)

박정희 정권때 위헌결정 단 1회!

헌재는 군사독재정권 때의 사법부가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부터 시민의 기본권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탄생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정권 아래서 법치주의의 미명 아래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이 유린당하는 일이 많았지만, 법원은 이를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

실제로 대법원이 헌재의 기능을 담당했던 이승만 정권 때 위헌 결정은 단 3건이 있었고, 박정희 정권 때는 단 1건에 불과했다. 박 정권 때인 1971년 국가배상법에 대해 위헌 판결(전원 일치)을 내린 대법관 9명은 이듬해 법관 재임용에서 모두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전두환 정권 때는 헌법위원회를 만들어 헌재의 기능을 담당하도록 했으나, 위헌 결정은 단 한건도 없었다. 반면, 헌재는 88년 9월 출범 뒤 불과 4년 만에 20개 법률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려 시민의 기본권 보호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헌재는 초기부터 정치권력의 집요한 견제에 시달렸다. 헌재가 주요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 결정을 내릴 때마다 정부와 정치권의 로비설이 끊이질 않았다. 헌재가 지난 90년 노동쟁의조정법의 제3자개입금지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릴 때 관련 부처 장·차관들의 로비설이 나돌았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불법단체로 판단한 근거인 사립학교법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릴 때도 불미스러운 잡음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 대해서는 헌재 스스로 몸을 사렸다. 지난 92년 노태우 정권이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연기한 것에 대한 위헌 여부를 심사할 때 “신중한 심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심리를 무기한 연기한 것이 대표적 예다. 이때 야당 몫으로 배정된 변정수(현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장) 재판관이 이 조치에 항의해 자진 사퇴했다. 헌재는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군사기밀보호법 등 위헌으로 결정될 경우 정치적으로 정부쪽에 큰 타격을 입히고, 합헌으로 날 경우에는 여론의 거센 비난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사건에서는 한정합헌이라는 ‘묘수’로 어려운 상황을 비껴가기도 했다.

헌재는 위헌 결정에 불복한 국가기관들의 거센 도전도 받았다. 헌재가 지난 90년 검사의 불기소처분 취소 결정을 내린 뒤 “검사의 불기소처분을 취소하고 기소하도록 함”이라고 밝혀 사실상 기소 명령을 내렸는데, 이에 발끈한 검찰이 “검찰의 기소독점주의에 어긋난다”며 반발했다. 결국 당사자에게 송달되는 최종 결정문에는 애초의 기소 명령이 재수사 명령 취지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헌재는 지금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군림하고 있다. 헌법을 잣대로 삼아 입법·사법·행정부 모두를 사법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제4의 권력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최근에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심판 사태는 헌재의 위상을 더욱 부각시켰다.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는 과정에서 시민들은 헌재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중산층 이상이 헌재 결정에 따른 혜택 봐

공룡에 비유될 만큼 막강한 권한을 가진 헌재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헌재가 사실상 대법원 위의 상급심 구실을 하고 있지만, 헌재의 결정에 대해서는 상소나 항고 등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헌재의 정치적 편향성도 문제로 지적된다. 헌재가 불공정한 부의 분배구조를 고치거나 필요에 따라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하는 정부 정책에는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만, 정치 사상의 자유나 노조활동의 자유에 대한 제약에는 관대한 결정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헌법의 취지에 어긋날 뿐 아니라, ‘소수자 보호’라는 헌재의 존립 목적에도 안 맞는다는 지적이다. 헌재의 위헌 결정 중 대부분이 재산권 행사를 직접 규제하는 국유재산법과 지방세법, 상속세법, 국세기본법 등 경제 관련 법률에 몰려 있기 때문에 주로 중산층 이상이 헌재 결정에 따른 혜택을 보고 있다. 정부가 분배정의를 위해 상류층의 재산권 행사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저소득층이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헌재가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법전에만 갇혀 있을 뿐 시민들의 일상과 전혀 관계가 없었던 헌법을 삶의 일부로 꺼낸 것은 헌재의 가장 큰 공로라 할 수 있다. 헌재 관계자는 “예전에는 사법 분야에서 국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처벌 여부와 형량이었는데, 지금은 국민들이 평등권이나 행복추구권 같은 헌법상의 기본권에 비춰 자신이 겪는 불이익을 따져 물을 수 있게 됐다”며 “헌재의 등장으로 비로소 헌법이 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칼로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민들 속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눈치를 살피지 말고 민감한 문제에도 분명하게 자기 의견을 밝히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법원 관계자는 “헌재가 중요 사건마다 소극적 자세를 보여온 점을 부인할 수 없는데, 과감히 위헌 결정을 내렸을 때 국민들의 박수 소리가 가장 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