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투명한 미래를 ‘개척’한 사람들… 새해의 첫 길목에서 들어보는 변화에 성공한 4인의 이야기
여기 꿈꾸었기에 변화했고, 변화했기에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불투명한 미래를 과감하게 개척한 사람들. 새해의 첫 길목에서 ‘변화에 성공한 4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변화 컨설턴트’에게 변화의 기술도 함께…. 당신도 변화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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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태반이 백수인 시대, 취직을 했다 쳐도 불안한 시대, 갈 데 없어도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때. 꿈이 메마른 시대에 역설적으로 꿈은 희소가치를 발한다. 나의 꿈이 무엇이었더라? 나는 정말 조직의 나사와 톱니바퀴로 살아야 하는 걸까? 대체 내가 원하는 게 뭐야? 변화는 화두다. 열망이다.
그런데 대체로 변화는 밖에서 밀려오는 압박으로 나타난다. “변하지 못하겠거든 떠나라”는 것은 차라리 협박에 가깝다. 고인 물 같은 공무원 사회에서도 연초부터 “스스로 발광(發光)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씀에 <기업이 원하는 변화의 기술> 같은 책을 뒤적이느라 분주하다.

△ 왼쪽부터 김진호 · 우서환 · 양경모 · 구본형 · 허수경씨. ‘자기변화 컨설턴트’인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장도 자리를 함께했다.(이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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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변화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만물의 본성이다. 여름철 무성했던 나무가 찬바람에 제 잎사귀 떨어뜨리며 겨울을 견디듯, 삼라만상은 변한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진리일진대, 변화는 고통스럽다. 두렵다. 대가가 필요하다. 그나마 가진 것도 잃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투명한 미래가 일상이 돼버리고, 변화의 물결이 요동칠 때 우리가 붙잡고 있는 작은 쪽배는 어차피 변화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 배의 진로를 결정하고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면, 당신이 그 배의 선장이 된다면, 변화는 두려움이 아닌 행복이 될 것이다.
“포도주처럼 숙성된 변화를”
국정원에서 와인가게 사장으로
한달 전 개업 2돌을 맞은 우서환(58) 비나모르 사장. 처음의 신선한 포도가 깊은 맛을 내는 포도주로 변하는 것처럼, 와인은 그의 인생을 발효시켰다. 대학을 마치고 “월급이 많고 대우가 좋아” 국정원(당시는 중앙정보부)에 입사했던 그는 30년을 남북관계 분야에서 일했다. 상황 파악이 뛰어나고 눈이 ‘꼼꼼’했던 그는 주로 남북회담 등이 열리는 현장에서 행사장을 지휘하는 일을 맡았다. 자연히 남북 인사들의 숙소나 연회장으로 이용되는 고급 호텔들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다보니 내부 구조나 서비스 방법은 물론이고 직원들과도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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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요원’같지 않죠?” 우서환씨는 질 좋은 와인과 환한 웃음으로 손님을 맞는다.(김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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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께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 고심하던 중 우연히 호텔 직원들로부터 와인을 조금씩 마셔보라는 충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원래 술을 많이 안 하거든요. 그런데 와인을 마시면서 그 다양한 맛에 빠져들었습니다. 와인이라는 것이 그냥 술이 아니고 종류와 제조법이 워낙 다양하고 역사가 깊지 않습니까. 와인 한잔 앞에 놓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해도 몇 시간은 거뜬히 보낼 수 있을 정도이니까요.”
와인의 재미에 푹 빠진 우 사장은 그때부터 각종 와인 시음회를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보통 수준 높은 시음회에 가면 해설자가 나와 유래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는데, 이석기 와인문화연구원장이 주로 해설을 맡았어요. 내가 그 앞에 앉아 노트를 펼쳐놓고 부지런히 받아 적는 걸 보고 이석기 원장이 ‘참 열심히 한다’고 칭찬을 해주데요.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동호회를 만들면 어떨까 용기를 냈지요.”
당시는 인터넷이 아닌 통신 동호회가 유행하던 때였다. 와인만 취급하는 동호회는 아직 없던 터여서, 일단 식도락 동호회에 와인 분과를 내게 됐다. “그 와인 분과 이름이 ‘비나모르’(와인사랑이라는 뜻)였어요. 1999년 5월 첫 번개모임을 열었어요. 신라호텔 식음 담당자로부터 좋은 와인도 싸게 얻고, 와인에 대한 각종 자료를 모아서 가보았더니 고작 5명 앉아 있더군요. 시솝인 저 빼놓곤 죄다 20대 젊은이들이었죠.”
시작은 미약했으나, 비나모르 동호회는 날로 번창해 나중엔 스페인 대사가 와인 90병을 보내줄 정도로 영향력 있는 와인 동호회로 커나갔다. 하지만 와인 시음을 ‘공부’하듯 몰아붙이는 우 사장에게 젊은 동호회원들이 질렸던 걸까. “비나모르의 1인 독재에 대해 비판자들이 속출하더라고요. 저는 번개모임에서 2차는 절대 허용하지 않았어요. 1차 끝나고 나면 곧바로 집에 돌아가서 오늘 느꼈던 맛에 대해 꼭 비평을 해야 한다는 게 원칙이었으니까.” 50대의 노(老)시솝은 이 예상치 못한 반란에 잠깐 좌절했으나, 곧 쿨하게 ‘이별의 글’을 올리고 유니텔 동호회를 접었다 한다.
“그동안 많이 배웠어요. 1주일에 한번씩은 꼭 이름난 가게를 돌며 와인을 골랐고 와인 잡지도 꼬박꼬박 챙겨보고, 인터넷으로 와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으니까요.”
2001년 1월 국정원을 퇴사하고 난 직후에도 와인을 사업으로 연결시킬 생각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퇴직한 해 프랑스에서 열린 와인엑스포에 아내와 함께 갔죠. 아내는 그 전까지만 해도 내가 와인에 대해 그만큼 많이 아는 줄 몰랐나 봐요. 프랑스의 내로라 하는 전문가들과 막힘 없이 와인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렇게 좋아하는 와인을 비싸게 밖에서 마시지 말고 공급가로 싸게 마시는 게 어때요 우리가 와인 가게를 열어봅시다’ 하더라고요.”
장사 경험은 없었지만 부부는 용감했다. “오랜 국정원 생활 동안 내내 ‘갑’의 위치로 살았기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을’로 바뀌는 게 어려웠어요. 기관원의 딱딱한 표정에서 부드러운 서비스 의식이 밴 가게 주인의 자세가 쉽게 나오지는 않잖아요. 그렇지만 내가 이토록 좋아하는 와인의 정확한 정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명예퇴직은 차라리 축복이었다”
종금사에서 에코숍 경영인으로
우서환 사장이 예정됐던 퇴직 뒤에 자연스럽게 변화가 일어난 것과 달리, 양경모(46·반디 에코숍 대표)씨는 1998년 4월까지 구제금융기 회오리의 복판에 놓여 있던 종금사에서 일했다. ‘명예퇴직’이란 이름과 달리 그다지 명예스러운 퇴직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에겐 축복이었다. “퇴사 전부터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구본형씨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 같은 책을 밑줄 치며 읽던 시절이었죠. 돌파구를 스스로 찾지 못했는데, 강제로나마 탈출구가 열린 셈이지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달 동안은 아이들과 함께 강원도 동강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 다음엔 부모님과 함께 캐나다를 다녀왔다. “밀린 숙제를 마쳤다는 생각이 들자, 할 일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는 본래 생태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아이들을 자연학교 같은 데 보내면서 보호자라는 ‘핑계’로 휴가를 내고라도 함께 따라갔었죠. 그런 곳에 아빠랑 같이 온 애는 우리 애들뿐이었지만.”

△ 회사보다 숲과 들판이 더 ‘적성’에 맞았던 양경모씨는 “자연 속에선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김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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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숲해설가협회 전신인 자연환경안내자협회에서 7개월 동안 무보수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스스로 기획한 숲해설가 교육 프로그램을 열심히 수강했다. 숲해설가로만은 벌이가 되지 않아 부업으로 보험일도 겸했다. 그러나 “고작 몇달 동안 교육을 받고 나서 업으로 삼는 것이 정직하지 않은 것 같아” 숲해설가로 전업하는 것을 망설이던 그에게 다시 눈이 번쩍 뜨이는 일이 벌어졌다. “2002년 8월 보름 동안 미국에 연수를 받으러 갔다가 환경체험용품 판매 전단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건 좀 되겠구나!”
2003년 돋보기·야외현미경·탐조 스코프·망원경·나무퍼즐·버드콜(새소리를 내는 도구) 등을 취급하는 에코숍을 열었다. 5년 동안 쌓아왔던 인맥과 정보가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에코숍이 큰 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보람 있는 일이라고 여긴다. “자연을 관찰하는 일은, 꽃이 피고 지고 하는 시간의 변화를 현장에서 지켜보는 일입니다. 가슴 뛰는 삶이지요. 취미가 아니라 그런 일에 제 ‘하반기 인생’을 쏟아붓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종금사 퇴직 뒤 그는 보험업계로 이직할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때 보험일을 했던 동료들은 종신보험으로 평생 벌 돈을 한번에 다 벌기도 했었죠. 저도 입사 권유를 받았는데 1차면접을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번이야말로 인생을 변화시킬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어요.” 그는 자기가 원하는 변화를 위해선 무모함도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소심한 영혼은 외부 세계로 나오는 재생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처럼. 하지만 단기간에 집중해서 뿌리를 뽑겠는다는 성급함은 금물이다. “오히려 ‘꿈이 있으면 언젠가는 이뤄진다’고 생각해요. 조급하면 불투명한 전망에 자신을 오래 묻어둘 수 없으니까요.”
새로운 인생을 위한 배수진!
카메라 들고 ‘나만의 앵글’을 만든다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김진호(40)씨는 올해 3월 상명대 예술디자인대학원에 입학한다. 5년 동안 취미로 사진을 찍었던 그는 3년 전부터 문화아카데미 등에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우면서 맛을 들였다. 그리고 더 이상 회사원으로 살아갈 수 없는 변환점에 이르고야 말았다. “앞으로 10년, 20년 회사일을 계속하고 싶어할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봤더니 회의적이었어요. 회사 안이든 밖이든 불안한 건 마찬가지 아닌가 싶고요.”

△ 평소 ‘모범적으로’ 살아 온 김진호씨. 40년 만에 처음으로 내 인생 찾겠다며 ‘사고’를 쳤다.(이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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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진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선, 뭔가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40년 인생 동안 처음으로 창작에 대한 희열감을 주었다고 했다. “그냥 말썽 없이 공부 열심히 하고, 성적 맞춰 과도 고르고, 괜찮은 직장에 입사하고…. 내가 뭘 하고 싶어하는지 알고 선택한 것은 사진이 처음이에요.” 몇달 동안 반대하던 아내도 “완강하고 집요하게 떼를 쓰니까” 두손 들었다. 가족들의 반대가 한풀 꺾이자 시원스레 사표를 던졌고, 대학원 시험에 합격했다. “내가 사진작가로 성공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아무리 재능이 없어도 어떤 일이든지 10년을 정성껏 하면 틀은 잡을 수 있다고들 해요. 사진이라면 최소한 10년 동안은 내가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11년 회사 생활은 무리 없이 해왔지만 스스로 ‘조직인’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어떤 일을 혼자서 집요하게 추진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과 소통하는 걸 즐기고 그 안에서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는 약합니다. 저는 조직에서 강요하는 각종 변화들을 개인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동안 조직 안에선 ‘변화를 즐기지 못할 바엔 차라리 모른 척하자’라는 신조로 살아왔었죠.” 하지만 배수진을 치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그는 불안함 속에서도 행복해 보였다.
“이혼의 상처를 사업으로”
색깔 있는 결혼정보회사 차리다
2002년 10월 ‘철학이 있는 결혼정보회사’라는 컨셉트로 사업을 시작한 허수경(35·매치코리아 사장)씨는 이력서가 길다. 졸업 뒤에도 학생운동을 계속했던 그는 어느 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친구와 함께 조그만 호프집을 차렸다. 돈은 잘 벌렸다. 하지만 일요일에도 늦게까지 가게를 지키는 것이 지겨워질 무렵, 건물 주인과 마찰이 생겼고, 돈을 떼였고, 3일 동안 끙끙 앓다 이부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경실련 간사 생활이 시작됐다.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을 벌였고, 시민영화축제도 기획했고, 미디어감시 활동도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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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씩씩한 여자.’ 허수경씨(왼쪽)는 변화의 고비마다 특유의 열정과 낙천성으로 성공에 다가갔다.(류우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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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월급이 몇달째 안 나오는 상황에서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다. 1997년 시공사에 입사해 만화·무협 분야 담당 편집자로 출판계에 발을 디뎠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긴 했지만 교정·교열 같은 작업은 제게 안 맞았어요. 대신 기획서를 수십통씩 써서 올렸죠.” 지금이야 보편화됐지만 당시만 해도 전문적인 기획 업무가 전무하던 시절, 그의 의욕이 가상하게 받아들여졌다. “입사 1년6개월 만에 시공사에 처음으로 기획팀이 만들어졌고 전 팀장으로 발령이 나서 신나게 일했어요.”
그 무렵 결혼을 했다. 만약 그 결혼이 행복했더라면 그는 지금도 잘나가는 출판기획자로 일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어느 날 남편이 ‘이건 내가 원하던 결혼생활이 아니다’라며 헤어지자고 했어요. 이후 6개월 동안 남편은 침묵시위를 벌였고, 2년6개월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어요.”
시어머니와 남편·아들을 남겨놓고 혼자 집에서 달랑 빠져나오자 막막했다. “혼자 있는 공황을 견디지 못했어요. 인터넷을 뒤지다 이혼자들의 모임인 ‘솔로닷컴’을 알게 됐고, 거기에서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이혼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것만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 처지를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혼자 밥먹고 혼자 영화보고 혼자 등산하는 데서 기쁨도 느끼게 됐고.”
솔로닷컴을 통해 이혼의 상처를 벗어난 허 사장은 이혼의 원인이랄 수 있는 결혼에 생각이 미쳤다.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결혼을 하기 때문에 이혼율이 높아지는 게 아닐까요? 자기 증상이 뭔지 모르고 약사에게 가서 잘 듣는 약 내놓으라고 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조건만 따지다 결혼하니까요.” 허 사장의 뼈아픈 체험을 토대로 한 ‘매치코리아’는 애니어그램을 통한 성격 분석과 상담을 통해 짝을 맺어주는 것이 특징이다.
그에게 이혼은 원치 않는 변화였지만, 이혼을 통해 그는 깨달음을 얻었고 하고 싶은 일도 찾아냈다. 변화의 계기를 변화의 동력으로 바꿀 줄 아는 지혜를 가졌기 때문이다.
변화는 그 급작스러움과 속도로 어지러움을 일으키지만, 사실 변화(變化)라는 말 자체는 노력이 쌓였을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래서 지혜의 고전인 <중용>(中庸)은 변화에 대해 이같은 가르침을 남겼다.
“한 가지에 몰두할 수 있으면(曲) 능히 정성이 있게 되고(誠), 정성이 있으면 그것이 안에서 쌓여 밖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있게 되고(形), 그것이 더욱 드러나면(著) 빛이 성하게 나타나고(明), 밝으면 사물을 움직이게 되고(動), 움직이면 변하고(變), 변하면 새로운 형태가 갖춰지게 된다(化).”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