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누구도 그들을 말릴 수 없다 ‘신당바람’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바모’ 재선그룹, 그들은 누구인가
2001년 상반기, 민주당 ‘바른정치실천연구모임’(약칭 바모) 소속 재선의원 7명이 초선들을 떼어놓은 채 강원도의 한 콘도미니엄을 찾아 그들만의 결의를 다진다. “우리는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의형제나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배신하지 말자”는 다짐이 농반진반으로 오갔다. 당의 쇄신과 개혁을 위해 몸바칠 각오를 다짐하는 순간은 엄숙하기까지 했다. 참석한 인물은 정동영·신기남·천정배·정세균·정동채 의원. 이 자리엔 김민석 전 의원과 김한길 전 의원도 있었다. 나중에 김민석 전 의원이 딴 길을 가자 ‘바모’의 재선들은 “그렇게까지 맹약해놓고 어떻게 배신할 수 있느냐”고 입맛을 다셨다.
당 쇄신을 위한 ‘도원결의’
‘바모’의 재선그룹은 요즘 민주당을 휩쓸고 있는 ‘신당바람’의 핵이다. 거슬러올라가 민주당 쇄신운동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이른바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으로 불리는 세 사람은 민주당 변화를 주도해왔다. 재선그룹은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위해서도 헌신했다. 당내에선 평가가 엇갈리지만 어쨌든 이들을 빼놓고 지금의 민주당을 얘기하기는 어렵다. 이들의 정치적 지향점과 이해관계, 비전을 살피지 않고서는 신당론의 배경과 전망을 정확히 짚을 수 없는 것이다.
‘바모’의 재선그룹은 이후에도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개혁세력의 적자임을 자임한다. 베트남과 캄보디아도 부부동반으로 다녀온다. 이들은 국내에서도 광양과 무주 등지로 무수히 어울려다니며 스킨십을 쌓았다. 부부동반 모임이 많아지면서 부인들도 친구처럼 친해졌다. 이들의 모임이 단순한 친목도모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정치현안을 놓고 토론을 벌일 땐 양보가 없었다. 지금 민주당에서 논의되고 있는 신당론의 큰 뼈대도 이때 논의됐던 내용들이다. 잦은 어울림과 토론이 신뢰로 쌓였는지 이들은 몇 차례 고비를 겪으면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끈끈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들이 ‘조폭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장면까지 연출하며 결속과 연대를 다진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2000년 12월4일 김태홍·정범구·이호웅·김성호·이재정 의원 등 초선 의원들은 동교동계의 2선퇴진을 요구하는 ‘당정쇄신 건의서’를 청와대에 전달한다. 앞서 12월2일엔 청와대 최고위원 만찬에서 정동영 최고위원이 김대중 대통령과 권노갑 최고위원의 면전에서 권씨의 2선후퇴를 요구했다. 결국 권씨는 12월15일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이듬해 3월28일 권씨는 서울 마포에 사무실을 내고 정치활동을 재개한다. 3·26개각에선 문화관광부 장관에서 물러난 박지원씨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돌아왔다. 동교동계는 다시 전면으로 등장했고 권씨는 여권의 실질적인 2인자로 통했다. 당시 김중권 민주당 대표가 개각 날짜마저 몰라 망신당한 사례는 동교동계 구파들만의 폐쇄적 정보유통 흐름을 드러낸 대표적 사례였다. 민주당의 인기는 바닥이었고 재집권 전망은 극히 어두운 시절이었다.
동교동의 적자에서 반항아로
이런 현실에 비분강개한 재선그룹은 이때를 전후해 김대중 대통령과 담판을 시도한다. 하지만 면담을 요청해도 응답이 없었다. 답답해진 이들은 당정쇄신을 요구하는 연대서명 ‘밀서’를 작성해 청와대의 한 비서관을 통해 김 대통령에게 전달해줄 것을 요청했다. 밀서는 정동채 의원이 작성했다. 나중에야 밝혀졌지만 이 밀서는 중간에 차단돼 김 대통령에게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이들은 권노갑씨와도 만나 설득을 해봤다. 정동채·추미애·정동영 의원이 어느 날 신라호텔 중국음식점에서 권씨와 마주 앉았다. 이들은 “권 고문이 나서서 좀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권씨는 버럭 화를 내고 나가버렸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절망을 느낀 이들은 이때부터 ‘거사 준비’에 돌입한다. 이들의 만남이 부쩍 잦아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재선그룹이 결속을 다지는 데 그토록 애쓴 것은 일전불사의 의지를 다지기 위한 일종의 전열 가다듬기였던 셈이다. 안동수 법무장관 경질파동이 불거지자 초선 의원들이 먼저 치고 나갔다. 재선의원들이 가세하느냐가 정국의 분수령이었다. 신기남·천정배·송영길 의원이 2001년 5월25일 성명서를 발표해 당정 수뇌부의 전면쇄신을 요구했다.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1차 쇄신파동이었다. 천정배 의원은 “옳다는 확신도 있었지만 두려움도 컸다. 거대권력에 맞서 함께 싸운 경험은 굉장한 것이었다”고 당시를 돌이킨다. 쇄신파동을 계기로 재선그룹은 정치적 명분과 여론의 지지를 확보하며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자리잡는다. ‘바모’ 재선그룹이 원래부터 동교동계와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엔 그 반대였다. 이들은 원래 15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영입한 ‘젊은 피’의 대표선수들이다. 천정배 의원은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렸고, 신기남 의원은 변호사 출신이면서 4년간 TV 시사 프로그램을 맡아 제법 지명도가 있었다. 정동영 의원은 문화방송의 간판 앵커였다. 추미애 의원도 입당 때부터 현직 판사 출신이어서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이들은 일단 신선하고 개혁적인 이미지로 나름의 상품성을 평가받았다. DJ는 초선의 정동영·신기남 의원에게 각각 대변인을 맡길 정도로 이들을 총애했다. 금배지를 단 이들은 식당이든 술집이든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새로운 정치에 대한 꿈을 나눴다. 김대중 총재는 이들의 전문성과 아이디어를 기대하며 이들 중심으로 총재특보단을 꾸렸다. 당시 특보단장이 문희상 현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그러나 사건이 터졌다. 97년 5월23일 비공개 특보단 회의에서 이들이 건의한 내용이 신문에 보도된 것. 특보단의 건의내용은 “김대중 총재의 둘째아들 홍업씨가 운영하는 ‘밝은세상’을 당 조직으로 흡수해야 한다”며 사실상 홍업씨의 정치관여 중지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특보단은 곧바로 해체됐다. 당시는 그런 분위기였다. DJ에 대한 이들의 최초의 ‘저항’은 완패로 끝났다. “정치가 이렇구나”라는 생리를 터득하는 계기였다.
호남출신이면서 탈호남의 기수
이런 상황에서 97년 대선이 다가왔다. 이인제 후보가 세대교체론을 내세워 바람몰이를 하던 상황이어서 김대중 총재의 고령이 문제였다. 초선의원 몇몇이 모였다. “DJ는 나이가 많지만 마음은 젊다. 우리가 나서서 DJ의 젊음을 과시하자.” 이렇게 해서 97년 11월 결성한 것이 ‘푸른정치모임’. 여기서 발전시킨 것이 ‘파랑새유세단’이었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재선 고지에 올라선 이들은 ‘바모’를 결성한다. 깊이 있게 토론하고 신뢰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자는 차원에서 인원을 소수로 꾸렸다. ‘소수정예’로 뭉치자는 것이었다. ‘바모’ 소속 재선그룹은 16대 들어 당의 중간당직을 독차지하며 당내에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한다. 정동영 의원은 대변인, 천정배 의원은 야당과의 협상창구인 수석부총무, 신기남 의원은 문화·복지정책을 총괄하는 제3정조위원장, 정세균 의원은 경제분야를 다루는 제2정조위원장, 정동채 의원은 당의 기획을 맡는 기조위원장, 추미애 의원은 총재비서실장과 지방자치위원장을 역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DJ정치학교의 모범생’이었으며, 동교동계와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일부에선 ‘동교동계가 키운 황태자 그룹’이라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원내총무가 정균환 의원이었고 사무총장이 김옥두 의원이었다. 전당대회 이후 동교동계의 좌장 권노갑씨는 이들에게 따로 사무실을 차려주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이 무렵에 대해 천정배 의원은 “쇄신요구를 미진하게 한 잘못이 있었다. 그때는 어떻게 해서든 기성질서 안에서 해보려고 했지만 곧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이 났다”고 돌이켰다. 동교동계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잘 나가던’ 재선그룹이 쇄신운동을 주도하며 내세운 명분은 동교동계가 당의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드리운 부정적 그림자의 청산이었다. 하지만 여기엔 재선그룹의 정치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이들은 중요 당직에 포진해 있었지만 여전히 당내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되고 있었다. 당의 한 관계자는 “자신들이 결국은 ‘동교동계의 액세서리’에 불과하다는 자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큰 꿈을 안고 정계에 입문한 이들은 자신들이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민주당의 인기 하락과 재집권에 대한 어두운 전망은 점점 이들을 우울하고 못 견디게 만들었다. “이게 아닌데…”라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드디어 행동돌입에 나선다. 동교동계를 표적으로 삼은 쇄신운동은 ‘탈호남’이라는 흐름과도 맥이 닿아 있다. 재선그룹은 대부분 호남출신이면서도 민주당 내 ‘탈호남 운동’ 흐름의 진원지였다. 2001년 10·25 재보선 참패 직후 이강래 의원이 만들고 재선그룹이 돌려보던 비밀문건 ‘민주당 어찌할 것인가’엔 “탈호남을 통해 호남당이 아닌 전국 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자”는 문구가 담겨 있다. 신당론의 흐름은 이때 이미 방향이 잡혀 있었던 셈이다. 이들은 지난 대선운동 때도 노무현 후보에게 ‘탈호남’을 강하게 주문했다. ‘탈호남’은 이들에게 숙원사업이나 마찬가지였다.
재야파와 ‘바모’의 차이점
민주당의 기반을 전국으로 넓히자는 주장은 그 자체로 부정할 수 없는 명분이 있다. 하지만 유독 재선그룹이 이 흐름에 앞장선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들은 호남출신이되 호남만을 정치적 기반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학벌과 능력, 전문성, 참신한 이미지를 고루 갖춘 이들에겐 호남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호남출신이라는 점은 동교동계와 같았지만 정치적 기반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송영길 의원은 “재선그룹이 호남출신이다 보니 오히려 위축되지 않고 탈호남을 주문할 수 있는 측면도 있었다”고 분석했다. 민주당 쇄신운동을 주도해 정당개혁의 선두주자라는 정치적 명분을 획득한 재선그룹은 지난해 대선 때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헌신함으로써 정치적 힘까지 얻었다. 이제 당내 어느 누구도 이들이 민주당의 주류로 떠올랐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됐다. 이 지점에서 ‘바모’의 재선그룹을 민주당 내 신주류의 또 다른 주요 세력인 재야파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김근태·임채정·이해찬·이상수 의원 등 여러 차례의 ‘수혈’ 과정을 통해 DJ와 결합한 재야파는 재선그룹보다 숫자도 많고 선수도 높은 고참들이었지만 쇄신운동 과정에서 동교동계를 공격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여기엔 통합을 앞세운 나름의 명분도 있었고, 동교동계와의 인간적인 교분 등 이해관계도 얽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재야파는 재선그룹쪽에 주도권과 정치적 명분을 빼앗겼다. ‘탈호남’ 문제에서도 재야파와 ‘바모’쪽은 의견이 갈렸다. 재야파는 늘 통합을 강조했다. 지난 대선 때도 재야파는 ‘DJ와의 차별화 전략’을 주문하는 ‘바모’쪽 재선그룹의 주장을 반대했다. 신당추진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재야파는 여전히 호남 구주류를 인위적으로 배제해선 안 된다며 통합을 강조한다. ‘바모’쪽 재선그룹이 기득권 포기와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핵심으로 하는 ‘개혁신당’을 강조하고, 재야파가 ‘통합신당’에 기우는 듯한 모양새도 두 그룹의 ‘인식의 차이’와 관련이 깊다. 어쨌든 ‘바모’쪽도 민주당을 뛰쳐나가는 방식의 강경한 신당론을 양보한 만큼, 신당론은 곧 가닥이 잡힐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신당 이후다. 신당의 얼굴로 누가 나서느냐, 신당을 어느 세력이 주도할 것인가를 두고 신주류의 두 축인 ‘바모’와 재야는 협력도 하겠지만 때론 신경전도 벌일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재야파쪽에선 구주류와 신주류를 아우를 수 있는 인물로 김근태 의원을 거론한다. 김 의원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바모’ 내부의 분화조짐도 일부 엿보인다. 추미애 의원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정동영 의원은 물론이요, 신기남·천정배 의원도 ‘신당 이후’에 대한 의욕이 없을 수 없다. 이들은 각각 홈페이지를 새롭게 구축하고 보좌진을 보강하는 등 의미 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우리에게도 곧 때가 올 것”
재선그룹은 대중적 정서를 잘 포착해내 발빠르게 대응함으로써 여론의 흐름을 타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조직적으로 세력을 모으고 포용하는 능력은 부족했다. 이 때문인지 “지나치게 이미지에 치중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천정배 의원은 “전혀 수긍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적어도 지난 3년 동안 우리는 한국정치의 발전을 위해 가장 열심히 싸웠다. 그 결과로 우리의 이미지가 좋아졌다면 그건 좋다. 이미지를 노려서라도 누가 좀 나서줬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들은 또한 문제를 제기하고 일을 저지르는 데는 능란하지만 문제를 수습하고 일을 집행하는 능력은 떨어진다는 지적도 받았다. 천 의원은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곧 때가 올 것이다”라고 여운을 남겼다. 재선그룹은 지난해 대선을 마친 뒤 “우리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였다”는 평가를 내렸다. 후보단일화 흐름에 휘말리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한목소리를 낸 데 대한 자평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같은 이념적, 정치적 지향으로 뭉친 집단은 아니다. ‘일반 민주주의적인 개혁’ 정도가 이들이 추출해낼 수 있는 이념적 공통분모일 것이다. 따라서 남북문제나 사회복지 분야의 각론에 들어서면 이들의 의견이 부딪칠 가능성이 있다. 대북송금특별법을 두고 이들의 의견은 여러 갈래로 엇갈렸다. 문제제기 집단에서 문제수습 집단으로 ‘신분상승’을 이룬 ‘바모’는 이제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라서고 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