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여당 프리미엄 포기했던 이회창 후보

(사진/개표상황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이회창 후보와 조순 총재. 패배를 인정하고 깨끗이 승복했다. )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선거 결과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12월19일 새 벽 1시50분쯤 여의도 당사에 나타났다. 그는 상황실에 들러 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한 뒤 기자들에게 “김대중 후보에게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결과가 공식 확정되기도 전에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깨끗이 승 복한 것이다. 그는 이어 “새 당선자가 어려운 경제난국을 극복하도록 적 극 도와줄 것”이라며 김대중 당선자에 대한 협력의 뜻도 피력했다. 사상 초유의 평화적 정권교체의 순간에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 태도와 용기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도 “진심으로 고맙다”고 화답했다.

이 후보는 원칙과 소신의 ‘대쪽판사’라는 평을 바탕으로 김영삼 정권 들어 감사원장과 ‘법대로 총리’를 거쳐 집권당의 대표와 다수당의 대통 령 후보 당선 등 짧은 기간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 인생 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김 대통령과의 끊임없는 갈등과 당내 다수파 인 민주계의 외면, 아들 병역문제로 인한 지지도 하락, 당내의 후보교체 론 대두 등 갖가지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60평생을 존경과 예우만 받던 점잖은 ‘양반’으로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면전에 서의 삿대질 등 말못할 수모도 겪었다. 정치적 포용력과 통합력 부족, 보 수와 개혁을 오락가락하는 태도 등이 그의 정치적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 기도 했다.

그러나 역경에 부딪치면서 그는 다시 ‘원칙과 상식’의 ‘법대로’로 돌 아갔다. 특히 이 후보가 지정기탁금제 폐지를 선언하면서 여당 프리미엄 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그동안 누구도 하지 못했던 ‘거사’였다. 선거과 정에서 대규모 군중동원이나 유세가 사라진 것도 다수당의 동의나 협력없 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과거 고질적이던 관권선거나 금권선거의 시비가 일지 않은 선거운동의 발전을 이룬 데도 어쨌든 이 후보의 구실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한나라당 이 과거 여당과 달리 돈을 흥청망청 쓰지 않은 것이야말로 이 후보의 덕 분이었다. 다수당이 선거운동 기간에 지구당별로 법정선거비용밖에 되지 않는 2천만원 안팎의 돈만 내려보낸 것은 우리 선거사상 처음이다. ‘검 은 돈’이 과거처럼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후보의 의지 도 많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백남치 조직본부장의 5백억원 사채조달 시도 등 흠결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 후보는 선거과정에서 불법적인 자금 조달이나 배분 등을 본인이 거부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히 금하는 등 선거법 준수 의지를 강하게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는 19일 “종전 선거에 비해 돈도 안 쓰고 깨끗한 선거를 위해 애쓴 보람 을 느낀다”고 말했다.

자기 세력이 약한 정치신인인 그가 대선 패배 이후 어떤 정치적 행보를 취할지는 아직 점치기 어렵다. 정치를 계속할 경우 지나온 길보다 앞으로 가 더 험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걷든 정치인 이회창이 수행했던 ‘새정치 실험’은 우리 정치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 것이 분명하다.

김종철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