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한국경제 추락은 끝났는가

(사진/끝없이 추락하던 주가지수가 환율이 떨어지면서 400선을 회복했다. )

한국경제의 모라토리엄(대외채무지불유예) 위기는 지나갔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양 극단으로 나뉜다. 한쪽에서는 최악의 상황은 넘겼다고 말 한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위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최악의 위기가 지나갔다는 주장은 외환, 주식시장 등 국내 금융시장의 상 대적인 안정세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12월8일부터 12일까지 5일간 가파 르게 오르며 1달러=2천원 시대의 도래가 임박한 듯했던 원화 환율은 내림 세로 반전해 16일에는 1천4백원대까지 떨어졌다. 연일 끈 떨어진 연처럼 곤두박칠치며 350선 붕괴를 코앞에 두었던 주가도 상승세로 돌아서 400선 을 회복했다.

3당후보 청와대 회동이 전환의 계기

곧 붕괴할 것만 같던 금융시장이 안정세로 급속히 돌아서기 시작한 전환 점은 13∼14일 주말 이틀간. 금융당국과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지난 13일 김영삼 대통령과 3당 대선후보들이 만나 “IMF와의 합의사항을 준수하겠 다”고 약속한 것을 결정적 분기점으로 꼽는다. IMF와의 재협상론으로 상 징되는 한국 국민들의 IMF 반감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였던 해외투자자 들을 다독거릴 수 있는 분수령이 됐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의 한 간부는 “한국이 IMF 지원만 받고 합의사항은 이행하지 않으려 한다며 극도의 불 신감을 보였던 해외투자자들의 인식을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고 말했다.

정부도 대통령과 3당후보들의 약속을 계기로 IMF와의 합의사항 이행에 박 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12일 기업에 대한 장기 현금차관 도입 허용, 13일 법정 최고금리 연 40%로 상향조정, 15일 환율 하루변동제한폭 폐지와 금 융기관 합병 활성화 방안 발표, 16일 상장사 M&A 활성화 조처 등 정부는 마치 IMF에 항복선언이라도 하듯 그동안 꼭 틀어쥐고 있던 한국시장의 보 호막을 훌훌 벗어던져 버렸다. 지난 3일 5백70억달러를 지원받는 대가로 IMF에 이행합의문을 제출하고서도 소극적 태도를 지켜왔던 정부가 태도를 180도 바꾼 것이다. IMF의 요구사항과는 별도로 시장안정조처도 뒤를 따 랐다. 환율안정을 위해 외환시장에 적극 개입하고 한은을 통해 은행 등 금융기관에 11조3천억원을 긴급지원하기로 한 것은 그 대표적 사례다.

정부의 태도변화에 따라 미국, IMF, 해외언론들도 즉각 화답하고 나섰다. 클린턴 미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3당후보들과의 약속 을 높이 평가하고 적극적인 협력의사를 피력했다. 캉드쉬 IMF총재는 한술 더 떠 “한국은 최악의 상황을 넘겼다”고 침을 튀겼다. 11일까지만 해도 한국정부와 국민이 구조조정의 고통을 감수할 준비가 안 돼 있다며 모라 토리엄 선언을 검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해외언론들도 “한국의 금융시스템이 붕괴될 경우 국제경제에 연쇄적으로 큰 파장이 일어날 것” 이라며 분위기 전환을 재촉했다. 이런 갑작스런 변화는 물론 벼랑끝에 몰 린 한국경제가 ‘무장해제’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결과였다.

외환,해외차입 여건 개선되지 않아 불안

(사진/채권시장개방 등 외국 자본 유입을 위한 적극적인 조치들이 이뤄졌지만 외국인들은 한국금융시장과 환율이 여전히 불안정하다고 보고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

그러나 문제는 이런 분위기 반전에도 외환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필수적인 외환사정의 개선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위기 가 계속되고 있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시중은행의 한 외환딜러는 “국내기관들의 해외차입 여건이 개선되지 않고 있는 시장 상황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면서 “IMF나 미국, 일본 등 선진국도 모두 립 서비스에 그쳤고 실질적으로 추가 자금지원이 이루어진 것은 없지 않 느냐”고 말했다. 재경원은 현재의 외환보유고만 가지고도 연내에 상환해 야 할 단기부채를 충당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이 구동성으로 “불안하다”고 말한다. 한은의 한 간부는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외채 가운데 해외금융기관이 재연장해 주는 비율은 20%대에 머물고 있다”면서 “15일 하룻동안 한은이 국내 금융기관에 지원한 자금만 10억 ∼20억달러에 이른다”고 말했다. 은행들이 정부의 강한 압력에도 불구하 고 수출환어음의 매입을 계속 기피하고 있는 것이나 이틀간 내림세를 보 였던 환율이 17일 상승세로 돌아선 것도 이런 여건을 반영한 것이다.

외국인들에게 대폭 문호를 개방했음에도 주식과 채권시장에 외국인 투자 자금 유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외국인들은 주 식투자 한도가 50%로 확대된 11, 12일 이틀간 3천8백여억원의 순매수를 기록했지만 이후 4일간 2백90여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12일 대폭 개방된 채권시장의 외국인 투자자금 유입 규모도 1백10억원대에 머물고 있다. 증 권사의 한 직원은 “외국인들은 한국 금융시장과 환율이 여전히 불안정하 다고 보고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환시장 주변에서는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이 한국의 모라토리엄 선언 은 원치 않지만 지금 시점에서 바로 대대적인 지원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 라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외환시장 관계자들은 미국 등 선진국들의 태 도가 분명하게 드러날 시점을 한국의 대통령 당선자가 결정된 이후로 보 고 있다. 외환당국의 한 간부는 “미국 등이 노리는 것은 결국 대선이 끝 난 뒤 차기 대통령 당선자가 맨발로 달려와 도와달라고 싹싹 비는 것”이 라며 “11, 12일 상황이 극도로 악화된 데는 대통령 당선자에게 압박을 가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 아니냐는 시각도 적지 않다”고 말했 다. IMF 관계자가 지난 17일 캉드쉬 총재와 한국의 차기 대통령 당선자간 면담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언급한 것은 이런 점에서 주목된다.

IMF와 미국 등이 노리는 것은 항복선언

5백70억달러의 거액을 지원하기로 한 IMF로서 다음 정권의 책임자로부터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도 모른다. 또 우리 정부가 합의안대로 많은 조처를 취했음에도 부실은행과 종금사 처리 방식 등 일부 대목에서는 IMF와 마찰을 빚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I MF와 미국 등은 외환위기를 지렛대로 삼아 차기 대통령의 약속을 포함해 한국정부가 완전히 백기를 드는 시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