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마들’을 택하시길 바랍니다

당선자께선 북한산 동장대에 오르시길 기대합니다. 겨울바람 뼈를 찌르고 잔설과 얼음에 곳곳이 미끄럼틀인 요즘이야말로 적기입니다. 우이동이나 수유리에서 대동문쪽으로 오르든, 구기동이나 평창동을 통해 대남문 혹은 대성문쪽으로 오르든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어느 곳이든 산길이야 평 탄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선자께 던져진 한표 한표엔 개인적인 사랑과 함께 당신이 지고가야할 지난한 요청이 담겨 있음을 당선자께선 잘 아실 겁니다. 그 크기는 바다 를 덮고 그 무게는 태산을 능가합니다. 거기에 또 무엇을 더하겠습니까만 은, 당신이 그 무게와 크기를 실감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하기에 전하는 부탁입니다.

북한산 동장대에 오르시길 바랍니다

능선에 오르면 북악을 향해 오른편으로 북한산 주릉과 의상봉 능선이 팔 벌려 감싸안은 행궁터가 포근히 들어앉아 있습니다. 왼편으론 마들평야가 가뭇없이 펼쳐집니다. 행궁터엔 예나 지금이나 물과 나무 그리고 새들이 인적을 희롱하며 한데 어우러지고 마들엔 우이, 수유, 쌍문, 상계, 중계, 하계동으로 이어지는 서민들의 삶터가 꼬리를 뭅니다.

그곳 산성과 마주한 당신에겐 대뜸 한가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대성문 이건 대남문 대동문이건 도성을 마주보며 편액이 걸려있고 빗장도 걸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 외침에서 도성과 백성을 막기 위한 성이라면 당연히 빗장은 도성쪽에 있어야 할텐데…. 그 의문은 누각에 올라 능선의 안쪽 행궁터를 보면 풀립니다. 성채는 백성이 아니라 피난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백성의 삶터, 지배자의 피난처. 이 명암이 선명한 두 지점이 선명하게 대 비되는 곳이 다름아닌 동장대입니다. 행궁을 보호하기 위한 망루 가운데 가장 높이 위치한 누각이기 때문이죠. 두발로 걷기에도 힘겨운 이 능선을 따라 북한산성 12.7km를 축조한 것은 바로 그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백 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른의 몸통만한 돌을 저 산밑에서 끌고 밀고 하여 이 성을 쌓았습니다.

행궁을 감싸안은 북한산성은 1711년 숙종 37년에 지어졌습니다. 임진왜란 으로부터 30년뒤 인조가 정묘호란을 맞아 강화도로 피신했고 그로부터 9 년뒤 병자호란을 맞아 역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지 30여년이 지 난 뒤였습니다. 병자호란때 인조는 삼전도에서 ‘오랑캐’에게 고두사죄 하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백성 수십만은 청군의 칼에 죽임을 당했거나 노 예로 끌려갔습니다.

왜 이런 참극이 빚어졌는지는 당선자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그러나 사람 들은 그저 나라살림이 엉망이었기 때문일 거라고만 치부합니다. 물론 중 요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비껴가는 이유 역시 이에 못지않게 중 요합니다. 인조는 형인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들에 의해 옹립됐습니다. 정 권의 변방에 있던 서인은 쇠잔해가는 명과 발흥하는 금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로 균형을 잡아가던 광해군을, 바로 그 외교정책을 빌미로 내쫓고 권 력을 잡았던 것입니다. 거사의 이유가 숭명배금이었기에 그들은 대륙을 평정해가던 금에 대해 적대정책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묘, 병 자호란은 그에 따른 결과였죠. 화친에 적극적이었던 소현세자의 의문사도 그 즈음 발생했습니다. 세자의 죽음 이후 인조는 세자빈마저 폐위시켰습 니다. 의문사엔 의문이 없습니다. 서인이 집권하고 있던 숙종 말년까지 이 정책은 지속됐습니다. 지배세력의 이런 조처는 그들이 자신의 기득권 을 유지하고 패전의 책임에서 벗어나며 도탄에 빠진 민심의 이반을 잠재 우기 위한 정략에 따른 것일 뿐입니다.

그들의 정략으로 인한 백성이 당한 고통을 역사는,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무참한 학살로 인해 한양 도성엔 ‘시체가 산을 이루고 들개들만이 시체 를 뜯어먹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싸움을 고집하던 집권세력들이 모두 강화도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을때 요행히 살아남은 백성들은 오랑캐에 붙들려 백금 5냥(성인 남자) 3냥(성인 여자)에 팔렸으며 그마저 없는 백 성은 오랑캐의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그 수가 20만∼30만명이었다고 합니 다. 이 속에서 추진된 것이 바로 한양 도성의 개축과 바로 이 북한산성 및 행궁의 신축이었습니다. 도성의 장정이 모두 동원된 역사였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국난을 맞아 당신이 서있을 곳을 정해야 합니다. 행궁인 가 마들인가. 저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당신은 마들을 택해야 합니다. 인 조처럼 야반도주해 산성으로 피하거나 이승만처럼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 가서는 안됩니다. 국난이건 평시건 당신은 마들의 국민 속에 있어야 합니 다.

무수한 ‘서인’과 ‘남인’사이에서…

당신이 들어가 살게될 청와대는 분명 도심 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피난처인 이곳 행궁보다 더 높은 벽들로 둘러쳐져 있습니다. 경호 실과 수경사 경비단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무수한 ‘서인’ ‘남인’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재벌일 수 있고 기존의 권력자일 수 있고 또 언론일 수 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전임자의 실패는 그들의 벽 속에 머물렀던 탓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민 족이 우리에게 ‘개혁’을 강요하는 웃지못할 상황까지 초래했다고 말입 니다.

지금 행궁에서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려했던 사람들은 모두 한줌 흙이 되 어 사라졌습니다. 행궁도 주춧돌 몇개만 뒹구는 유허로만 옛자취를 전합 니다. 그들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권력 혹은 기득권 역시 산새와 들 짐승의 희롱거리일 뿐입니다. 길고긴 칼끝의 날들을 살아온 당신에게 오 늘의 기쁨은 분명 남다를 것입니다. 그런 당신에게 축전의 잉크가 채 마 르기도 전에 고난을 말하는 게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가야할 길 엔 가시덤불만 그득해 보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뒤늦게나마 당선 을 축하드립니다.

다리가 불편하시다면 승용차로 오르는 남한산성도 괜찮습니다.

곽병찬 한겨레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