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권리 찾기

세입자는 참아야만 하나요

(사진/갈라진 벽으로 빗물이 스며들어 곰팡이가 핀 이인숙씨의 전셋방.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아 이사를 가지도 못하고 있다.)

“차라리 이사가고 싶어요. 무엇보다도 이제 백일이 지난 아기가 걱정돼 요. 습기가 많아서인지 병치레가 잦거든요.” 이인숙(29·서울 송파구 가 락동)씨가 남의 집살이의 고통을 겪기 시작한 것은 지난 4월 지금의 집으 로 이사하면서부터였다. 5층 맨 꼭대기층이라 오르내리는 데 불편했지만 남편 직장과 가깝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먼저 살던 세입자가 집에 대한 이러저러한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그리 신 경쓰지 않았다. 비가 새는 것 때문에 집주인과 다퉜다는 말보다는 집주인 이 고쳐주겠노라고 약속했다는 말이 더 미더웠다. 계약을 대신했던 복덕 방에서도 집주인이 유명한 대학병원 의사인데다 가락동에만 상가건물 몇 채를 소유한 갑부라고 귀띔을 해주었던 터였다.

그러나 그 믿음이 무너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마가 닥 치자마자 작은 방에 비가 새 한쪽 벽을 온통 적시고 침대 커버까지 못쓰 게 만들었다. 집주인에게 빨리 고쳐줄 것을 부탁했다. 전에 살던 세입자 에게 수리를 약속하지 않았었느냐고 물었지만 그런 약속 한 적이 없노라 는 답변에는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곧 조치를 해주겠다는 약속은 망가진 벽지를 뜯어내고 새로 도배하는 수준이었다. 옥상에 새롭게 방을 들이면서 방수에 문제가 생긴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씨는 재차 수리 를 요청했지만 집주인의 답변은 단호했다. 수리비가 3백만원이나 들어가 는데 돈이 없어 수리를 못한다는 거였다. 9가구가 세들어 살 정도로 커다 란 건물을 소유한 사람이 돈이 없다니….

어긋나기 시작한 집주인과의 관계는 자꾸만 꼬여 갔다. 한 건물에 같이 사는 집주인의 누나와도 마찰이 잦았다. 싱크대 위 찬장이 떨어진다고 유 리그릇 같은 무거운 것은 올려놓지 말고 플라스틱으로 된 가벼운 것만 올 려놓으라는 등의 잔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이사 온 지 한달도 채 안 돼서부터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보일러도 수리 비 4만원만 돌려주었을 뿐 다른 조치는 하지 않았다. 수리공은 보일러가 낡은 데다 수압이 낮아 물공급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자꾸 고장난다며 새것으로 교체하라고 권했다. 벌써부터 큰방에는 난방이 되지 않아 전기 장판을 깔고 지내지만 먼젓번 세입자를 찾아가서 고쳐달라고 하라는 어이 없는 답변이 전부였다.

이런 집에서 계약기간 2년을 다 채운다는 것이 끔찍했다. 베란다에 널어 놓은 빨래까지 통행에 방해된다며 함부로 밀쳐대는 집주인 누나의 행동은 차라리 횡포에 가까웠다. 이사비용을 감당하더라도 이사하는 것이 낫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전세금을 돌려달라고 부탁했지만 돈이 없으니 정 이사 를 가고 싶으면 직접 복덕방에 방을 내놓고 전세금을 빼가라는 거였다. 한쪽 벽이 파랗게 곰팡이가 피고 난방조차 제대로 안 되는 집에 누가 이 사오겠냐는 이씨의 항변에도 요지부동이었다. 법으로 해결하는 길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대로 해보라고 큰소리치는 집주 인의 누나와 해결이 될 때까지 얼굴을 맞대는 것이 고통이겠지만 이씨는 그 길을 찾기로 마음을 다졌다. 적어도 망가진 보일러를 고쳐달라는 이씨 의 요구가 부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