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초점

5년마다 도지는 망국병

(사진/<조선일보> 17일자 '이회창-김대중 양자구도' 기사와 관련해 국민신당 당원들이 조선일보사 앞에서 격렬하게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대선 투표일 하루 전인 12월17일 국민신당은 선거운동을 제쳐 놓고 <조선 일보>와의 전쟁을 벌였다. 이날치 신문에서 <조선일보>가 ‘이회창―김대 중 양자 구도’라고 판세를 보도한 데 격분하고 나선 것이다. 이인제 후 보는 대국민 마지막 호소 형식의 긴급 기자회견을 온통 <조선일보>와 <중 앙일보> 비난에 쏟았다. 대변인단은 “5년마다 도지는 조선일보의 고질적 망국병”(장신규 부대변인), “조선일보는 사기행위를 지면에 공개사죄하 라”고 맹비난했다.


아파트에 하얗게 깔린 <중앙일보>

국민신당 당원들은 전날 저녁 배포된 다음날치 <조선일보> 가판을 미리 보고 조선일보사 사옥으로 몰려갔다. 당원 1백여명은 신문 발송장 입구를 가로막고 “발송 중단”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트럭에 실린 신문 몇뭉치가 끌어내려져 불에 타기도 했다. 당원 한 사람은 충돌 와중에 머리가 찢기는 상처를 입었다.

국민신당쪽의 격렬한 항의는 <조선일보> 보도가 ‘이인제 찍으면 김대중 된다’고 주장하는 한나라당의 막판 표몰이 전략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 로 봤기 때문이다. 반DJ 성향의 부동표 유권자가 품고 있을 사표 방지심 리를 한껏 자극하자는 의도적 보도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중앙일보>도 12월15일치 1면과 3면 머릿기사를 통해 거의 똑같은 보도를 했다. <중앙일보>는 아예 “‘여론조사 결과 등을 종합한 결과’ 이회창―김대중 양자 대결 구도로 압축됐다”고 보도해 기사의 ‘ 신뢰성’을 높이려 했다. 중앙선관위는 이를 선거기간중 여론조사 보도를 금지한 선거법 위반이라며 중앙일보사를 경고처분했다.

이날 아침 부산·경남과 대구·경북, 수도권 아파트 단지 등에는 중앙일 보가 새하얗게 깔렸다. 구독 여부와 관계없이 집집마다 배포됐으며, 아파 트 입구에는 아예 뭉텅이로 쌓아 놓은 곳도 수북했다. 중앙일보와 한나라 당 어느 쪽에서 먼저 이야기가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나라 당쪽이 중앙일보 보도방향을 미리 알고 신문을 대량 구매해 당보 뿌리듯 이 뿌린 것만은 틀림없어 보이는 대목이었다.

<중앙일보> 이날치 기사는 전날 저녁 나오는 가판에는 없다가 새벽에 인 쇄되는 가정 배달판에 등장한 것이다. 국민신당쪽은 ‘기습적으로 허를 찔렸다’며 가슴을 쳤다. 신문사로 몰려가 아우성을 쳐볼 틈조차 주지 않 은 전격작전이었다는 것이다.

언론의 여권편향 대선개입 논란은 대선 레이스 초반부터 불거지기 시작했 다. 지난 10월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이른바 ‘DJP연합’을 성사시키자 상 당수 언론은 나눠먹기의 위험성 등을 거론하며 야권의 움직임을 비판적으 로 보도했다. 이런 탓인지 김대중 후보의 지지율은 DJP연합 성사를 계기 로 상승세를 멈추고 제자리 걸음을 하기 시작했다.

반면 11월 들어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7 대 3의 지분으로 합당을 선언한 데 대한 보수언론 대부분의 논조는 ‘축복’ 그 자체였다. 두당의 합당 논의 과정에는 이회창 후보 동생 회성씨와 조순 총재 아들간의 물밑 채널 이 가동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측근 정치의 위험성과 비정상적인 ‘ 거래’ 가능성 등을 경고하는 보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청와대 지원설, IMF 재협상 의도적 증폭

(사진/<중앙일보>는 이회창 선거 캠프인가? 중앙에 대한 의혹은 이회창 중심의 보도 태도뿐 아니라 이회창 문건으로 돌이킬 수 없게 됐다. )

11월4일 국민신당 창당 직후 소나기처럼 쏟아져 나온 일련의 ‘청와대 지 원설’ 보도는 이번 대선에서 언론이 주도한 최악의 선거개입 사례가 될 공산이 크다. <중앙일보>와 <조선일보> 등은 당시 ‘국민신당에서 김현철 인맥 철수 요구’ ‘청와대, 국민신당에 2백억 제공설’ 등 신한국당 등 이 제기한 일방적 주장을 연일 1면 머릿기사로 밀어붙였다. 국민신당쪽의 해명이나 반론은 한귀퉁이에 아주 조그맣게 붙이고 신문 제목에도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당이 2백억원 제공설을 오전에 대변인단 논평으로 주장했다가 오후 들어 취소해도, 이들 신문들은 그 주장을 끝까 지 밀어붙였다. 주장한 사람이 사라졌는데도 주장 자체는 밀고 가는 기이 한 양상이었다.

선거전 막바지에 터져나온 IMF 재협상 논란도 사실 일부 보수언론에 의해 증폭된 인상이 짙었다. 발단은 12월7일 대선후보 2차 텔레비전 토론회에 서 김대중 후보와 이인제 후보가 재협상 필요성을 시사하면서 제공된 것 이다. 김대중 후보쪽은 같은 테마로 신문광고를 내면서 선거전 활용을 시 도하기도 했다.

역공은 조순 한나라당 총재가 캉드쉬 IMF 총재와 통화해 재협상 주장 때 문에 자금지원을 늦출 생각이 있다는 식으로 캉드쉬가 말했다고 전하면서 시작됐다. 조 총재는 그러나 통화 내용을 전한 데 대해 한 출입기자가 “ 캉드쉬가 분명히 그런 표현을 썼느냐”고 확인성 질문을 하자 “꼭 그런 것은 아니다”라며 우물쭈물했다.

하지만 일부 보수언론에 그런 정확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조선일보 >는 11일치, <중앙일보>는 12일치부터 재협상론을 대대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절정에 올랐던 경제파탄 책임론은 대선 쟁점에서 사라 졌다. 대신 재협상을 주장한 두 야권후보가 하루 아침에 ‘매국노’로 몰 렸다.

재협상 공방 보도가 시작되기 직전인 12월10일께 김대중―이회창 후보간 지지율 격차가 6∼10%까지 벌어졌다는 사실도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 이 회창 후보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원투수를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 언론이 집요하게 여권편향 보도를 하고 나서는 배경은 무 엇일까.

11월 말 익명의 제보로 불거진 <중앙일보>의 이회창 후보 선거전략 보고 서 작성 의혹 사건은 이런 궁금증을 해소할 단서의 일단을 제공한다. 당 시 국민신당과 기자협회 등에 제보된 바에 따르면 <중앙일보>쪽은 이회창 후보 진영 출입기자에게 선거전략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한 뒤 고위 간부 를 통해 진명에 전달하는 등 깊숙이 선거에 개입한 것으로 돼 있다.

<중앙일보>쪽은 “문건 형태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으나 어디까지나 통 상적인 정보보고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석연치 않았다. 더욱이 <중앙 일보>가 일련의 보도를 통해 ‘친이회창’ 성향을 짙게 나타냈기 때문에 의혹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일보 주필의 섬뜩한 망언

12월16일 밤 조선일보사로 몰려간 국민신당 당원들에게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이 취중에서 내뱉었다는 말도 인구에 회자된다. 최철규 국민신당 부 대변인이 논평을 통해 전한 바에 따르면 김 주필은 “대통령선거 뒷날이 면 국민신당과 국민회의는 모두 죽어 없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국민 신당 관계자는 “권력감시라는 본연의 자세를 넘어 권력 만들기를 주도하 겠다는 일부 언론의 오만함을 한순간에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창식 기자/ 한겨레 정치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8년01월01일 제 1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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