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고통은 시작됐다

(사진/고용불안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납득할 만한 수준의 조치들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한국경제의 IMF 관리체제 이행이 확연해졌다.”(<니혼게이자이신문>) “IMF와의 협상 이후 한국 정부가 취한 가장 과감한 정책이다.”(<뉴욕타 임스>) 지난 12월16일 정부가 환율변동폭의 제한을 완전 철폐하는 조치를 전격 발표하자 외신들은 이런 내용의 보도를 일제히 쏟아냈다. 그동안 우 리 정부의 미적지근한 조치나 정치권의 재협상논란을 두고 협약 이행 여 부에 극도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것에서 180도 바뀐 것이다. 이같은 평가들은 외환위기가 계속되고 있는 한국의 대외신인도 회복에 약간은 도 움을 주겠지만, 그 이면에 담긴 속뜻은 분명하다. 우리 정부가 IMF와의 협약을 더욱 철저히 이행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 지인 것이다.

몇년 걸릴 조치들이 며칠 사이에 무더기 발표

IMF와 긴급자금지원을 위한 협상을 공식타결한 지난 12월5일 이후 정부는 그동안 협약 이행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IMF 배후에 버티고 있 는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밴 이행조건은 우리가 기존에 펼쳐온 경제정책 이나 기업문화의 이질성으로 보아 상당한 마찰이 불가피한 수준이다. 그 러나 협약의 차질없는 이행없이는 위기 해소가 어렵다는 것이 점차 분명 해지면서 평소 같으면 몇년이 걸릴 조치들을 정부는 불과 며칠 사이에 잇 따라 내놓았다.

우선 정부는 IMF와의 협약에 따라 내년 물가상승률을 5% 이내로 억제하기 위해 통화긴축기조를 강화하기로 했다. 해외자본의 유입확대를 위해, 4.5 %로 묶어두었던 하루 환율변동폭을 10%로 늘린 데 이어, 제한폭을 완전히 폐지했다. 금융부문 구조조정 비용충당을 위해 특별소비세 및 교통세 세 율을 조정해, 오는 22일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관련세법 개정안을 처리할 예정이다. 또 고금리를 받아들이라는 요구에 따라 국내 금융상품의 이자 제한폭을 종전의 25%에서 40%로 확대했다. 국제적인 과세기준에 맞지 않 는 부가세의 면세·감면 범위를 축소 또는 폐지하고, 법인세·소득세의 비과세·감면 범위 축소를 위한 관련세법 개정안도 내년 2월 초 임시국회 에 제출한다.

금융개혁과 관련해서는 부실채권정리기금 확충을 통해 은행, 종금사의 부 실채권 11조원어치를 해소했다. 예금보험기금을 통해 앞으로 3년간 예금 원리금 전액을 보장함으로써 금융산업의 구조조정 여건도 마련했다. 경영 상태가 부실한 14개 종금사에 업무정지 명령을 내리는 등 부실금융사에 대한 구조조정도 가시화했다. 은행의 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 지도비율인 8%를 지키기 위해 22개 은행에 4조원의 후순위채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했고,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은 정부의 현물출자로 재무구조를 개선하도록 했다. 임창열 부총리는 또 “두 은행 가운데 하나를 외국은행에 인수합병 시키겠다”고 밝혔다. 금융기관 합병 등에 관한 기준을 제시하고 합병이 성사되면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강구해, 금융기관들의 자율적인 인 수·합병도 활성화되도록 했다. 한국은행법 개정안, 통합금융감독기구 설 립법안 등 13개 금융개혁법안은 1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할 예정이다. 시 가회계제도 도입 등 금융기관의 회계 및 공시에 관련된 규칙을 국제기준 으로 강화하며, 외국 금융기관의 현지법인과 증권사 설립도 내년 중반까 지 허용하기로 했다.

결합재무제표작성·외부감사 의무화

무역 및 자본자유화와 관련해서는 먼저 외국인 주식투자한도를 26%에서 5 0%로 확대했으며, 중장기 보증·무보증 회사채 시장을 개방했다. 또 기업 장기현금차관을 98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완전자유화했다. 정부는 이와 함 께 외국은행이 국내은행 주식을 4% 이상 매입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은행법개정안을 연말 임시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외국환평형기금 채권 으로 1백억달러 규모의 국채를 발행하기 위해 연내 발행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내년에는 민간기업의 해외차입 자유화일정을 1월까지, 기업어 음(CP) 등 마지막으로 남은 국내 단기금융상품에 대한 개방일정을 2월까 지 마련해 단계적으로 시행하게 된다. 무역관련 보조금, 수입승인제, 수 입선 다변화제도 등에 대해서는 내년중 IMF와 협의해 폐지일정을 마련하 기로 했다.

(사진/조셉 스티글리츠 세계은행 총재는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으면서도 1백억달러 규모의 차관제공 조건으로 3당후보들의 각서를 요구했다. )

기업지배구조와 관련해서도 추진일정이 마련되고 있다. 기업의 과다차입 구조개선을 위한 법인세법, 조세감면규제법 개정으로 오는 2002년부터는 자기자본의 5배를 초과하는 차입금의 손비인정이 불허된다. 금융부채 상 환을 위한 자산매각의 경우 99년까지 특별부가세가 면제된다. 결합재무제 표 작성 및 외부감사 의무화를 위해 연내 임시국회에서 외부감사법 등을 개정해 기업 경영의 투명성도 높인다. 기업의 인수·합병을 촉진하기 위 해 의무공개매수제도도 완화했다. 25% 이상 주식을 취득할 경우 50%+1주 까지 공개매수하도록 한 것을 40%+1주로 완화한 것이다. 또 자기자본비율 이 25% 이상인 30대그룹 계열사에 대해서도 부실한 기업을 인수할 경우 출자총액 제한에 대한 예외를 한시적으로 인정한다. 대규모 기업집단 계 열사간 상호채무보증을 단계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현재자기자본의 200%로 된 기업별 채무보증한도는 내년 3월 말까지 100%로 축소한다.

그러나 정부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고, 아직 이견을 좁히지 못 한 쟁점들도 많다. 정부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인다는 IMF와의 협약에 따라, 노동력 재배치를 촉진하기 위한 근로자파견법의 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정부는 또 고용보험제 적용 사업장을 10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하 는 한편, 실명제를 사실상 폐지하면서 무기명 장기채 3조원어치를 발행해 고용보험 확대를 위한 재원으로 쓰기로 했다. 일부에서는 정리해고제의 조기실시도 거론된다. 그러나 고용불안이 극도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노동 자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IMF 부실금융기관 정부 출자에 부정적

정부 조처에 대한 IMF의 불만도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다. IMF는 정부가 은행, 종금, 증권, 투신사에 11조3천억원의 자금을 지원한 것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막대한 통화증발을 초래하는 부실금융기관 에 대한 대규모 자금지원은 재정에서 부담한다는 원칙에 위배된다는 점에 서다. 정부는 지원금이 보조금이 아닌 유동성 지원이며, 시중통화를 환수 하면 연말 통화증가율 조건을 충족시키는 데는 아무 문제 없다고 기금쪽 을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부가 서울·제일은행에 각각 1조1천8백억원을 출자하고, 두 은행 외에 다른 은행 6∼7곳에 모두 1조여원을 출자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데 대해서 도 IMF는 계속 난색을 표시해왔다. 정부는 은행의 자체 노력만으로는 기 금쪽이 요구하는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출자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IMF는 부실금융기관은 정부 지원 없이 정리돼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출자지원의 전제조건으로 지원대상 은 행의 기존 주주나 채권자에 대한 불이익 조처를 강구하는 한편, 서울·제 일은행을 제외한 다른 6∼7개 은행에 대한 출자지원은 내년 이후로 일단 유보할 것으로 전해졌다.

IMF가 외국인에게도 국내은행에 대한 지분참여 기회를 보장하라고 요구한 것도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정부는 서울·제일은행 중 한곳을 이 른 시일 안에 외국금융기관에 매각하고, 외국은행에 대해 현재 국내 시중 은행의 동일인 소유한도인 4%를 넘겨 국내은행 주식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동일인 지분한도를 확대할 경우 국내금융기관 이나 기업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는 재벌의 은행지배라는 또다른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몇몇 재벌은 은행경영에 참여하는 방안을 적극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는 이에 대해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원칙을 지킨다는 것말고는 아 직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IMF는 18일 이후로 계획된 2차분 35억달러를 지원할 때, 고금리정책 유지 와 한국은행이 국내금융기관 해외지점에 외화자금을 공급하면서 벌칙금리 (리보+4%)를 적용하는 것 두가지만 점검한다. 정부는 금리를 40%까지 허 용하도록 이자제한법 시행령을 고친 만큼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 만 내년 1월8일 3차분 지원(20억달러) 때의 점검사항은 그 폭이 매우 넓 다. 금융감독기구 통합, 한은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물가안정 책임을 지도 록 하는 한은법 개정안 등 금융개혁법안, 기업투명성 보장법안, 선진국 기준에 부합하는 적대적 인수합병에 관한 법률, 외환보유고 공개 등을 처 리해야 한다. 정치권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으면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 도 있다.

정치권 재협상 논쟁으로 정부 입지 좁아져

그러나 IMF가 요구한 협약 이행조건들을 완화할 추가협상의 여지는 매우 좁아졌다. 정치권은 재계가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수입선다변화제도 폐지 , 그리고 실업률을 크게 높이게 될 지나친 긴축정책 등에 대해 추가협상 을 공약한 상태지만, 대통령선거를 치르면서, 정치권이 재협상논란을 쟁 점화함으로써 우리 정부의 입지는 매우 좁아져버렸다. IMF는 오히려 갈수 록 목소리를 크게 내고 있다. IMF는 18일 이사회를 열어 긴급융자제도를 의결하는 한편, 조기에 자금지원 요청을 하지 않은 국가들에 대해 지원자 금의 금리를 기존의 4.7%에서 2∼4%까지 인상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같은 금리 인상안은 정부가 2차분을 지원받으면서부터 곧바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사태를 초래한 우리 정부의 안일한 대처, 국익보 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앞세워 재협상 논란을 정치적 쟁점으로 끌어들인 정치권의 무분별함 때문에 국민들이 져야 할 짐은 더욱 무거워질 전망이 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