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스키장에서 일하는 ‘눈사람’들의 싱그런 겨울나기

(사진/휘닉스파크 유아들에게 스키를 가르치는 이영아씨. 여름에는 영하의 날씨를 찾아 뉴질랜드에서 강사생활을 하는 등 스키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겨울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드는 겨울이지만 오히려 겨울에 더 활동적인 삶들이 있다. 그것도 눈밭에서 말이다.

이영아(29·여)씨는 겨울만 찾아 날아다니는 스키 철새다.

지난해 겨울 전북 무주군 무주리조트에서 스키강사로 있었고 여름에는 다 시 눈을 찾아 적도 반대편의 뉴질랜드로 날아갔다. 뉴질랜드는 그때가 겨 울이었고 이씨는 여기서도 스키강사를 하며 이국의 눈밭을 즐겼다. 이씨 는 그리고 올 겨울 다시 돌아와 지금은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휘닉스파크 에서 스키강사로 또다시 터를 잡았다.

대구에서 무주로 출퇴근하며 스키 배워

선수 출신도 체대 출신도 아닌 일반대를 졸업한 여자로서는 특이한 인생 이다.

대구 영남대 원예과를 졸업한 이씨는 대학 시절 볼링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우연히 스키를 배운 늦깎이 스키어다. 워낙 운동을 좋아해 볼링동아리에 가입했는데 동아리에서 겨울에 용평리조트로 모꼬지를 가면서 난생 처음 스키를 타보게 됐다.

그러나 ‘늦게 배운 춤바람이 무섭다’고 단박에 스키에 빠져들었다. 고 향 대구는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데 눈 천지인 곳을 찾으니 별천지 처럼 여겨졌다. 스키를 꽤 타는 체육학과 선배로부터 제대로 배워서인지 그날 바로 중급 수준인 ‘핑크코스’를 정복해 성취감도 컸고 적성에 맞다는 느낌도 들었다. 특히 설원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두려움 섞인 짜릿함은 어 릴적 꿈속에서 새처럼 절벽 밑을 미끄러져 날아갈 때 느꼈던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나 대구에서 거리도 멀고 자가용도 없어 기껏해야 한 시즌에 3차례 정도 힘들게 용평을 찾던 이씨에게 희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구에서 2시간30분 거리인 전북 무주에 90년 무주리조트가 개장된 것이다. 이씨는 그뒤 여름에 아르바이트해 번 돈을 모아 겨울이면 무주리조트를 찾았다. 대구와 무주리조트를 운행하는 관광버스를 이용해 집에서 새벽 6시에 출 발해 9시 반에 무주리조트에 도착해서는 스키를 한나절 즐기고는 오후 5 시에 다시 대구로 떠나기를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되풀이했다.

당연히 스키실력은 일취월장했고 그럴수록 질리기보다는 스키에 심취하게 됐다. 이씨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단다. 그만두겠다는 것이 아니 라 더 정확하게 전문적으로 알고 싶다는 뜻이었다. 93∼94시즌 대명 홍천 리조트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1년 뒤에는 강사자격증을 땄다. 이제 는 즐기면서도 동시에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됐으니 걱정은 사라지고 마음이 든든했다.

여름에는 뉴질랜드에서 강사 생활

이씨는 지난 시즌 무주리조트로 직장을 옮기면서 우연히 여름이면 뉴질랜 드로 가는 기회를 잡았다. 이씨는 무주·전주 겨울철 유니버시아드 때문 에 국제경기 규격의 최상급 코스가 개설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타보고 싶어 지난 시즌에는 무주리조트에서 일했다. 그런데 당시 무주리조트는 뉴질랜드의 와카파파 스키장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어 와카파파 스키장의 인사과장이 마침 와 있었다. 이 정보를 들은 이씨는 늘 여름이면 스키를 못타 몸이 근질거렸는데 퍼뜩 스치는 게 있었다. 대학시절 영어회화도 열 심히 한 덕분에 영어권 국가에서의 의사소통도 무난했다. 열심히 하겠다 며 적극성을 보이고 영어도 꽤 하니 상대방이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회 사간 계약이 아닌 개인 신분의 계약으로 뉴질랜드에서 스키강사를 할 수 있게 됐다.

이씨는 올 여름 뉴질랜드에서 정말 즐거웠고 많은 것을 배웠단다. 7월 중 순부터 10월 중순까지 개장되는 뉴질랜드 최대의 스키장 와카파파는 슬로 프 수가 뉴질랜드에서 가장 많다. 또 해발 1천8백m의 고지대에 있어 낮은 곳에 있는 초보용 슬로프 말고는 자연설로만 덮여 있다. 물론 슬로프도 길다. 게다가 화산지대여서 나무가 거의 없는데다 거의 모든 곳이 눈으로 덮이기 때문에 아무곳이나 미끄러져 내려 가도 그곳이 바로 슬로프가 된 다. 낭떠러지 등 위험한 곳에 설치된 위험 표지판만 주시하면 된다. 이씨 는 새벽과 점심 시간 등 강의가 없는 짬을 이용해 자연스키를 만끽했다. 또 한겨울 석달 동안인데도 스키장 아래 마을 레스토랑에서 마을 사람들 과 스키장 사람들이 모여 수영복과 반바지만 입고 놀았던 비치 파티(Beac h Party) 등 뉴질랜드인과의 추억거리도 많다. 신혼부부와 스키광을 합해 봐야 10여명의 한국인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전혀 외롭지 않았다. 단체강 습의 경우 한국은 시간당 1만4천원을 강사료로 받는데 뉴질랜드는 그 2배 가 되는 등 벌이도 괜찮았다.

‘영하’ 찾아 떠나는 ‘스키 철새족’ 늘어

(사진/대학시절 교양수업으로 스키를 배워 인생의 방향을 바꾼 최문영씨는 성우리조트에서 일하고 있다. )

“또 와도 된다는 약속을 받았으니 내년 여름은 물론 99년에도 2000년에 도 뉴질랜드로 날아갈 생각입니다.” 이영아씨는 추운날씨 자체는 좋아하 지 않지만 어쨌든 ‘영하’의 온도만 찾아 다니는 ‘영아’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동안 없던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아직 남자는 없지만 결혼 도 하고 싶고 스키철새 생활도 계속하고 싶은데 둘다 함께 이룰 수 있을 지가 걱정이다.

이씨는 또 “한국은 스키를 고급 레저로 여길 수밖에 없는데 뉴질랜드에 서는 그냥 검소한 운동으로 즐긴다”고 일침한다. 한국은 스키복도 반나 절에 1만원 정도로 돈을 받고 대여하는데 뉴질랜드는 거저 빌려준단다. “리프트 탑승료는 한국과 비슷하지만 내장객들이 오두막집이라는 뜻의 라지(lodge)라는 곳에서 대부분 묵으며 하루 3만원 정도에 숙식을 제공받 는데 그러면서도 한국보다 더 서비스정신이 투철하다”고 말한다.

올겨울에는 휘닉스파크에서 일하고 있는 이씨는 원래 중상급 전문 강사인 데 현재 본격적인 스키철이 아니어서 중상급을 배우려는 사람이 적어 유 아반을 가르치고 있다.

이씨는 “아이들이나 초보자들은 강사의 말을 잘 따라 해 금방 배우므로 가르치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상급반에는 대충 배워 탈 줄은 알지만 자세가 잡혀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데 원래 타던 습관 때문 에 가르칠 때 뿐이지 혼자 두면 다시 나쁜 자세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여간해서는 고쳐지지 않아 가르치는 데도 애를 먹는다. 이씨는 따라 서 “되도록 초보부터 제대로 배울 것”을 권유한다.

교양수업으로 스키 배우며 설원의 꿈 키워

휘닉스파크에서 20여㎞ 떨어진 강원도 횡성군의 성우리조트에도 특이한 경력의 여강사가 있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 3학년에 재학중인 최문영(22 )씨다.

최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원외고에 입학하기 전인 겨울 친구들끼리 서 울 인근 스키장을 처음 찾았으나 당시에는 장래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어 이렇게 스키와 절친해 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활달하고 아이디어가 많은 최씨는 단지 수학을 잘해 고교 때 이과를 선택 했고 대학과 학과도 예상 커트라인보다 약간 낮게 하향지원했다. 그러나 도무지 사는 재미를 못느꼈고 갑갑했다. 동아문화센터에서 레크리에이션 을 배우기도 했고 모 방송사에 대학생 아이디어팀으로 가입해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으며 이때 만난 대학생들끼리 가수 이문세 등을 초청해 음 악회를 주최해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최씨는 대학 겨울 교양수업으로 스키를 선택하면서 낭만적으로 살 수 있는 인생의 활로에 대한 ‘하얀’ 꿈을 꾸게 됐다. 물론 아직은 포부만 크다. 장차 여러 부가적인 레저시설과 다양한 이벤트를 갖춘 스키 장을 운영하고 싶단다. 지난 시즌부터 스키강사를 시작했고 올해 1년간은 휴학하고 세계적인 리조트 체인망을 갖춘 클럽메드에 입사해 선진 레저기 법을 주마간산격이나마 훑었다. 곧 미국으로 유학가 경영학을 배울 계획 도 잡고 있다.

한편 즐거움과 커다란 포부만을 안고 스키장에서 부대끼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를 짓고 겨울에도 조금이라도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스키장에서 일하는 농사꾼도 있다. 성우리조트에는 겨울이면 패트롤 (안전요원)로 일하는 ‘농부 스키어’ 김종배(33)씨도 있다.

군대시절 경험 살린 ‘농부 스키어’도

김씨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고향에서 노모를 모시고 배추와 감자농사를 짓는다. 김씨는 어릴적 대관령 자연스키장에서 배운 솜씨로 86년 제대하자마자 알프스리조트에서 제설작업을 맡으면서부터 눈 밭을 또하나의 밥줄로 삼았다. 농부인 김씨가 겨울에도 일할 수밖에 없는 것은 노모와 남동생과 여동생 등 4식구를 먹여살리는 실질적인 가장이었 기 때문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자신은 고등학교만 졸업했지만 여동생은 대학에 다니고 있고 스키 선수 출신인 남동생 종연(30)씨는 이제는 베어 스타운에서 선수지망생을 가르치는 레이싱코치가 되어 있어 김씨의 마음 은 뿌듯하다.

나이가 찼음에도 농부라는 이유로 혼사가 잘 이뤄지질 않지만 김씨는 농 부 특유의 묵직함과 부지런함으로 성우리조트에서 최고의 패트롤로 인정 받고 있다. 계약직이어서 3조로 나뉘어진 패트롤의 조장은 명목상 될 수 없지만 실제로는 조장을 맡고 있을 정도다. 성우리조트에는 김씨와 같은 농사꾼 스키어가 김홍래(32)씨와 신용선(30)씨 등 2명이 더 있다.

스키장에는 지금 처지와 포부가 서로 다른 여러 ‘눈사람’들이 반짝이는 얼굴로 새하얗게 웃으며 ‘겨울아이’들을 포용하고 있다.

송창석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