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녹음거부한 마에스트로 첼리비다케의 현장음 CD 11장 사후 출시

프랑스영화 <디바>에는 음반 녹음을 거부하는 흑인 소프라노 가수가 나온 다. 그의 광적인 팬인 우편배달부는 독창회에 가서 그의 노래를 몰래 녹 음한다. 밤마다 테이프를 틀어놓고 훔쳐온 그의 무대의상을 쓰다듬으며 황홀경에 젖는 청년은 그걸 넘겨달라고 접근한 음반업자에게 쫓기게 된다 . 철저하게 생음악을 고집했던 디바는 대량복제시대를 거스르며 음악의 절대성을 지키려고 했던, 말 그대로 여신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상품화 할 수 없다는 그의 고백을 들은 청년은 그 녹음테이프를 주인에게 돌려준 다.

세르지우 첼리비다케(1912∼1996)는 생전에 단 한장의 음반도 녹음하지 않은 지휘자였다. 그런 그의 뜻이 ‘디바’의 그것과 같았는지는 모르겠 다. 다만 스튜디오에서 기계로 레코딩한 작업을 그는 서슴없이 ‘통조림 음악’이라고 부르며 업신여겼다. 음악은 현장에서, 소리가 흘러나오는 바로 그 시간과 공간에서 함께 하는 사람만이 제대로 들을 수 있다는 것 이다. “진실된 음은 살아있는 공간에서만 공감하고, 체험하는 것이 가능 하다”고 말한 이 마에스트로(거장)의 고집을 그가 살아있을 땐 아무도 꺾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첼리비다케는 그의 뒤를 이어 베를린필하모닉을 지휘했던 카 라얀과 비교된다. 카라얀이 끊임없는 레코딩 작업으로 세속의 영예와 돈 을 움켜쥐고 황제처럼 세계 음악계를 뒤흔들 때, 첼리비다케는 바랑메고 떠도는 선승처럼 달랑 지휘봉 하나를 들고 유럽의 여러 교향악단들과 신 화 같은 음악회들을 만들어냈다.

최근 11장짜리 <첼리비다케 에디션>을 내놓은 EMI쪽은 고인의 뜻을 거스 르면서까지 이 음반들이 나와야 했던 까닭을 “범람하는 그의 불법음반”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첼리비다케의 팬들은 <디바>의 우편배달부처럼 그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런 사연으로 이제 음악애호가들은 전설로만 내려오던 첼리비다케의 그 ‘현장음’을 듣게 됐다. 10장의 CD에 담긴 음악들은 그가 1979년부터 심 장마비로 타계한 96년 8월까지 뮌헨필하모닉과 방송용으로 녹음한 것들이 다. △하이든의 교향곡 92, 103, 104번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 △드뷔 시의 교향시 <바다>, 관현악을 위한 영상 중 <이베리아> △베토벤의 교향 곡 4, 5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 6번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 <지그프리트의 목가>, <지그프리트의 장 송행진곡> △슈만의 교향곡 3, 4번 △무소르크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 라벨의 <볼레로>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이 10장의 목록이고, 여기에 바 르토크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연습하는 현장스케치가 보너스 CD 1 장에 담겨 붙어있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독일 베를린 음대에서 철학과 작곡, 음악학을 공부 한 첼리비다케는 타고난 기억력으로 늘 암보로 지휘했으며, 지독하게 단 원들을 다그치고 연습시키는 철저함의 화신이었다. 보너스 판을 걸어놓고 리허설하는 그의 목소리가 “따라라, 빠라람, 띵 땅∼”하고 울려나오는 걸 들으면, 이 철인 같은 지휘자가 교향악단을 벼려가는 현장에 함께 있 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정확하게 한음 한음을 찔러가며 차곡차곡, 천천히 음을 쌓아 절제와 감동을 동시에 몰아치게 하는 그의 연주는 소름 돋을 만큼 냉철하면서도 감각적이다.

EMI쪽은 앞으로 명연주로 이름나 있지만 이번 선집에 빠져있는 브루크너 의 교향곡 연주실황과 협주곡 등을 묶어 10장짜리 <첼리비다케 에디션>을 다시 한번 내놓을 계획이다. 문의: 02-3449-9424.

정재숙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