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표지이야기

얼마나 긴 겨울이었던가

(사진/숱하게 다가올 겨울을 예감했을까. 청년 김대중)

그가 결국 겨울을 이겨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인동초’라는 자신의 별명에 걸맞게 온갖 어려 움을 이겨내고 네번째 도전 끝에 ‘부도옹’으로 우뚝 섰다.

김 당선자는 지난 12월21일 마지막 텔레비전 토론회에 끝머리에서 “그동 안 제게 기회를 주지 않은 국민들에게 원망도 많이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이 이때를 위해 나를 남겨두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고 밝 혔다. 그렇다면 이제 국민들은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이고 사람의 마음이 결국 하늘의 마음이니 그는 하늘의 뜻도 얻은 셈이 된다.


6·25, 반동으로 몰려 사살될 위기도

그에겐 ‘인동초’란 별명이 따랐다. ‘겨울을 견디는 풀’이라는 뜻이다 . 그 자신이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비유한 데서 비롯됐다. “그 가녀린 인동초가 겨울을 버티는 힘은 머지않아 봄이 온다는 믿음에 있다. 나 또한 겨울을 이기고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여 기까지 왔다. 수없이 많은 겨울이었고 또 기나긴 겨울이었다.”

무슨 겨울이 그다지도 많고 길었다는 것인가.

그의 겨울은 비교적 늦게 시작됐다. 어린 시절은 순탄했다고 하는 편이 옳다. 그는 1924년 1월6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도) 후광리 원후광에서 김 운식씨와 장수금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정 많고 예인 기질이 농후했던 그 마을의 이장이었다. 일제 때 하의도 소작 반대투쟁에 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머니는 독립심과 생활력이 유난히 강했다 고 한다.

전시 특별 조치로 1943년 한해 앞당겨 목포 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 인이 경영하는 한 해운회사에 들어갔다. 이 회사에 다니는 동안 그의 첫 아내인 차용애를 만나 가슴떨리는 연애 끝에 45년 4월9일 결혼했다. 해방 을 맞은 뒤 그는 자신의 회사를 차렸으며, 여운형이 주도하던 건국준비위 원회에도 참여했다.

6·25전쟁이 일어난 때 그는 첫번째 죽음의 고비를 맞았다고 한다. 해운 회사 사주로서 부르주아였던 그가 반동으로 몰린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 그는 형무소에 갇혀 있다 퇴각을 앞둔 인민군에게 처형당할 위기에 놓 였다가 탈옥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가 앞으로 넘어 야 할 여러 죽음의 위기 중 첫번째 고비일 뿐이었다. 물론 당시엔 전혀 예상치 못했겠지만.

그의 오래고 긴 정치적 불운은 54년부터 시작됐다. 해운회사와 목포일보 사 사장을 지낸 그는 목포에서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아 3대 민의원 무소 속 후보로 출마했다. 그러나 그를 지지하겠다던 노조 간부들이 경찰의 압 력에 굴복해 자유당쪽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당선은커녕 후보자 8명 중 중 간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56년 민주당에 입당한 뒤 장면 부통령 계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장면의 영향으로 토머스 모어라는 세례명을 받아 천주교에 귀의하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16세기의 사상가, 정치가로 결국 순교의 길을 택 한 토머스 모어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을 “아이러니컬”하다고 표현했다.


이틀을 못 넘긴 국회의원 신분

(사진/박정희 정권시절 3선개헌 저지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되는 김대중. )

지역구를 강원도 인제로 옮긴 58년의 4대 민의원 선거에서도 그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당시만 해도 야당 성향이 강했던 군인과 그 가족들이 대부 분이었던 이 지역에서 그는 출마조차 못했다. 자유당의 방해로 그의 후보 등록이 무효가 된 것이다.

이때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그가 자유당의 선거부정을 호소하기 위해 당 시 그 지역 사단장의 관사를 찾았다. 당시만 해도 군이 정치적 중립을 지 키고 있었고, 야성이 매우 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단장은 자리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돌아오면서 당번병에게 사단장의 이름을 물 었다.

“박정희 장군님이십니다.”

3년 뒤 5·16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당시 인제에서 사단장을 하고 있 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아쉬워했다. “만약 거기서 그를 만났더라면 우리는 함께 부정선거에 대해서도 의논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최대의 정 적이 돼야했던 숙명도 조금은 양상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선거의 당선자를 선거법 위반으로 고소해 다음해 승소 판결을 받 아냈다. 그러나 보궐선거에서도 그는 떨어졌다. 이 낙선은 그에게 두 가 지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하나는 그뒤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사상시비 였다. 김대중의 정적들이 모두 이 선거 과정을 참고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 그보다 더욱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세 차례의 잇단 낙선에 충격을 받은 그의 아내가 세상을 뜬 일이었다.

60년 그는 4·19혁명으로 실시된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 또 떨어졌다. 네 번째였다. 그러나 그로서는 후회없는 한 판이었다. 집권한 제2공화국의 장면 총리는 원외 지구당 위원장에 불과한 그를 민주당 대변인에 지명했 다.

당선자의 부정이 밝혀지면서 치러진 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그는 처음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꿈속에서도 그리던 금배지는 달아보지도 못했 다. 그가 당선된 것은 5월14일, 당선사례를 하러 다니다 15일 상경했으나 오후 6시를 넘겨 도착해 금배지를 교부받지 못했다. 이튿날 교부받으리라 했지만 그날은 날벼락같은 5·16쿠데타였다. 국회는 해산됐다. 천신만고 끝에 당선됐지만 그의 국회의원 신분은 이틀 만에 끝났다.

63년 정치활동 규제가 풀린 뒤 그는 민주당 신파를 중심으로 민주당을 재 건하고 대변인이 됐다. 그해 지역구를 고향 목포로 옮겨 당선됐다. 정치 를 시작한 지 거의 10년 만이었다.


박정희 “김대중은 꼭 떨어뜨려라”

67년 국회의원 선거는 4년 뒤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의 전초전으로 치러졌 다. 3선 개헌을 준비하고 있던 박정희는 이 선거에서 김대중의 당선을 집 요하게 방해했다. 선거운동 기간중 두 차례나 목포를 방문해 지역개발의 청사진을 제시하는가 하면 아예 국무위원들을 모두 목포로 불러들여 국무 회의를 열기까지 했다. 심지어 측근들에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대중 은 반드시 떨어뜨려야 한다”고 공언했다고도 한다.

박정희가 이렇게 김대중을 견제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원모심려한 박정희가 다음 야당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가 거의 유 진오로 굳어져 있었으므로 지나치다. 어쨌든 박정희는 뛰어난 대정부 질 문과 입안 능력을 가진 김대중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 것로 예 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선거 기간 중 김대중은 목포를 찾은 박정희에게 공개 질문을 했다. “ 혹시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을 한 번 더 하려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박 정희는 연설을 통해 대답했다. “내가 헌법을 고쳐서 대통령을 세 번 하 는 일은 없을 것이며 이런 말을 퍼뜨리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모략이다.” 자신의 생각을 간파당한 박정희가 기분이 좋았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선거는 여당의 온갖 부정과 심한 흥분 상태에서 치러졌다. 당시 신민당 대표위원 유진오는 “그것은 선거가 아니라 전쟁이었다”고 술회했다. 결 국 김대중은 그 전쟁에서 2천여 표차로 승리했다.

69년 말 신민당의 다음 대통령 후보로 지목됐던 유진오 총재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부총재인 유진산이 그 자리를 이었다. 그 즈음 신민당의 김영 삼 원내총무는 야당을 발칵 뒤집어놓는 선언을 했다. 이른바 ‘40대 기수 론’이었다. 앞으로 정치는 원로들이 아닌 40대들이 주도해야 하며 대통 령 후보도 40대에서 나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70년 9월 신민당 전당대회. 40대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 으로 압축됐다. 1차 투표에서 유진산 총재와 이철승이 지원하는 김영삼이 1위를 차지했으나 과반수에 이르지 못했다. 2차 투표에서는 이철승 지지 세력이 유진산에 반발하며 김대중을 지지했다. 김대중은 48표 차이로 김 영삼을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당선됐다.

그해 10월 기자회견에서 그는 남북교류, 4대 강국의 전쟁 억제 보장 등 통일 정책과 향토 예비군 폐지 등을 포함한 공약을 발표해 국민들 사이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곧바로 박정희 정부는 그에게 용공 혐의가 있으며 무책임한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계속된 죽음의 위기, 그리고 연금

(사진/그는 결국 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만 하는 신세가 된다. )

71년 대통령 선거에는 부정행위는 물론 김대중에 대한 용공 조작과 지역 감정 조장이 본격 등장했다. 그는 1백만명에 가까운 청중을 모은 장충단 공원 유세 등 전국에서 붐을 일으키며 선전했다. 그러나 그는 94만7천여 표 차이로 박정희에게 졌다. 꽤 큰 표차였다. 선거결과에 의문이 곳곳에 서 제기됐다.

김대중씨는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 벌어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또 한번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목포에서 광주로 가던 그의 자동차를 향해 대형 트럭이 달려든 것이다. 이 사고로 그의 자동차 바로 뒤에 있던 택시의 승 객 3명이 죽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는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이 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관절 장애가 나타났다.

72년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할 즈음 그는 고관절 장애 치료를 위해 일본에 있었다. 그는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과 미국의 정가에서 한국민주 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등 단체를 조직해 유신 반대 운동을 펼친다. 이런 그의 활동은 박정희에게 눈엣가시였다. 박정희는 김대중이 일본과 미국에 서 자유롭게 자신을 비판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73년 8월8일 그는 일본 그랜드 팔레스호텔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됐다. 바 다에 수장시키려는 박정희의 시도는 미국의 도움으로 실패했다. 괴한들은 13일 그를 한국 그의 집 대문 앞에 풀어놓는다. 14일 정부는 이 사건이 정부와 무관하다고 발표했다. 14년 동안이나 계속된 연금생활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항의했고, 한-일 각료회의를 무기한 연기했다. 또 북한의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이 사건을 중앙정보부의 행위로 단정하고 남북대화를 중단했다.

계속 연금생활을 하던 그는 76년 3월1일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함석 헌, 문익환, 이우정, 안병무, 김지하, 이태영, 정일형, 서남동, 함세웅, 문동환, 이문영, 윤보선 등 재야 인사들이 망라된 이 선언으로 그는 징역 5년, 자격 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77년 미국 의회에서는 ‘코리아게이트’ 청문회가 한창이었다. 이 청문회 에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이후락 당시 중앙정 보부장의 지시에 따른 일이었다고 폭로했다. 납치단의 명단도 공개했다. 그리고 박정희가 김대중과 미국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도 설명했다. 78년 12월27일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는 그의 마지막 사면에 김대중 을 포함시켰다.

79년 10월 박정희가 암살된 뒤 찾아온 80년 서울의 봄은 짧았다. 그는 복 권된 지 석 달이 못돼 다시 갇힌 몸이 되고 말았다. 전두환 세력의 모진 고문과 회유·협박을 받은 그는 80년 9월 남산 육군본부 군법회의에서 내 란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다음해 1월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면서 사형 이 확정됐다.


직선제의 과실을 빼앗기고…

전세계가 경악했다. 결국 전두환 정부는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 무기징역 으로 감형했다. 감형 조치 바로 뒤 전두환은 레이건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이어 82년 12월 전두환 정부는 “정치 행위를 하지 않 는다는 조건”으로 그를 석방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보냈다. 그는 미국 에서 강연을 하고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만드는 등 민주화 활동을 계 속했다.

83년 5월 한국에서 김영삼은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다. 23일 동안 계속된 이 단식으로 한국에서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가 탄생했고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공동의장에 추대됐다. 그는 85년 2 월8일 2년 남짓한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의 귀국길에는 20여명 의 미국인들이 신변보호를 위해 동행했다. 그와 김영삼이 함께 만든 신한 민주당은 2월12일 선거에서 제1야당으로 등장했다.

86년2월 신민당은 개헌을 요구하는 서명 작업을 시작했고 10월에는 ‘건 국대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이 사건이 진압된 뒤 성명을 발표해 “학 생들을 석방하고 대통령 직접선거제를 받아들이면 다음 대통령 선거에 나 서지 않겠다”고 밝혔다. 당시 서독을 방문중이던 김영삼은 이에 대해 이 렇게 화답했다. “김대중의 복권이 이뤄지면 나는 차기 대통령 후보를 김 대중에게 양보하겠다.”

87년 6월의 그 뜨거웠던 항쟁은 결국 군사정부로부터 대통령 직선제를 쟁 취했다. 그러나 직선제의 과일은 다시 군사정부의 2인자 노태우에게 돌아 갔다. 두 김씨의 분열 탓이었다. 자서전에서 그는 “나 혼자만이라도 양 보해서 단일화를 실행하지 못한 것을 참으로 그 뒤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 른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때늦은 후회일 뿐이었다.

88년 4월의 국회의원 선거는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내며 그가 이끄 는 평화민주당을 제1야당으로 끌어올렸다. 여소야대 정국은 90년 1월 민 정당, 민주당, 공화당 등 3당 합당으로 무너졌다. 그는 훗날 89년 말 노 태우로부터 합당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밝혔다.

9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이번에는 오랜 라이벌이자 동지인 김영 삼에게 졌다. 초원복집 사건, 이선실 간첩단 사건 등으로 얼룩진 이 선거 가 끝난 뒤 그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저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생활로 돌아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과 당원 동지 여 러분의 행운을 빕니다.” 어쩌면 그 은퇴는 한국 정치인이 보여준 가장 아름답고 모범적인 떠남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왔다. 93년 말 케임브리지의 한 컬리지인 크레아홀의 초 청을 받아 반년 가량 대학원생 생활을 끝낸 뒤였다. 그가 떠날 때 받았던 찬사보다도 훨씬 더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그의 지지자 중에서도 적잖은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났다. 어쨌든 그는 돌아왔고, 우리는 역사 속의 김 대중이 아닌 현실 정치인 김대중을 다시 만나게 됐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고 준비했던 대통령이 됐다. 어쩌 면 그가 살아온 70년 남짓의 역정보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더 좌우 할 5년을 앞에 두고 있다. 그가 행동하는 양심이나 전투적인 민주주의자 인지, 혹은 신보수주의자거나 대통령병 환자인지 이제부터 검증받는 기간 이 될 것이다.

김규원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8년01월01일 제 1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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