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표지이야기

IMF 치욕·지역주의를 깨라

(사진/"꽃을 다듬는 마음으로..." 곧 국정에 손을 댈 김대중 당선자의 앞날엔 다듬어야 할 장애물이 숱하다.)

‘국제통화기금(IMF) 치욕, 집권 뒤 1년 반 안에 극복하겠습니다.’

15대 대통령에 뽑힌 김대중 후보가 이 공약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을까. 김대중 정부의 앞날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 이다. 여의치 못할 경우 걸었던 기대만큼 실망도 클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분담’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이번 공황은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이고 쌓인 문제점이 폭발해 일어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때문에 단순 대증요법만으로는 치료할 수 없고, 근본 적이고 장기적인 처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대중 당선 자 역시 동의하고 있다. 이 위기를 경제체질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기 회로 삼자는 것이다.

김 당선자의 국제통화기금 졸업방법은 간단하다. 저축을 늘리고 소비와 투자를 줄여 경상수지 적자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선거 유세 때 김 후보가 내세웠던 단기적인 청사진은 이렇다. 먼저 정부 재정지출을 줄 이고 민간소비를 억제해 5∼6%대의 총소비 증가율을 앞으로 2년간 3∼4% 수준으로 낮춘다. 동시에 총저축률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92년 27.1%에 이르던 민간저축률이 지난해 23.7%로 떨어짐에 따라 총저축률은 96년 현 재 34.6%까지 떨어졌다. 이를 99년까지 36.5% 수준으로 높인다는 것이다. 같은 기간 총투자율은 기업과 사회간접자본의 과잉투자를 억제해 38.6%에 서 36%로 낮춘다. 이러면 99년 중반에는 경상수지가 국내총생산(GDP)의 0 .5% 정도 흑자로 돌아선다고 보고 있다(표 참조). 그뒤부터는 회복된 대 외신인도를 바탕으로 국제금융시장에서 좋은 조건으로 중·장기자금을 빌 려 쓸 수 있다는 계산이다.

여기서 열쇠는 ‘성장을 위한 고통분담’에 나서도록 국민들을 어떻게 설 득할 수 있느냐다. 김 후보는 선거공약을 통해 국무총리 밑에 고용안정특 별위원회를 두고 노·사·정이 참여하는 ‘고용안정 국민협약’을 체결하 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협약에 따라 해고를 통한 인원 감축 등 양(量)적 인 구조조정보다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노동조합이 임금 삭감을 감수하는 양보교섭 △순환휴직제 등을 통해 질(質)적인 구조 조정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6개월간 한시적으로 노동자 해고를 중지하고 모든 임금을 동결하는 조처가 포함된다.

이런 국민협약은 극과 극을 달리는 노사의 의견을 새 정부가 어떻게 좁히 느냐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 김 당선자가 활용할 수 있는 정책자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임금 동결 및 인하, 부가가치세 인상 등에 따른 소득 감 소분을 노동자에게 보전해 주기 위해 근로소득세를 분리과세하고 세율을 5∼25%로 낮추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국민협약을 뒷받침하는 데 드는 재 원을 확보하는 것이다. 방법은 무기명 장기채권을 발행하는 것이다. 여기 서 3조원을 조성해 고용안정사업에 2조원, 어쩔 수 없이 해고된 실업자를 위한 재취업사업에 1조원을 쓰겠다는 계산이다. 고용안정사업은 기업들이 일자리 유지에 나서도록 인센티브를 주는 사업이다. 해고 대신에 노동시 간을 줄이고 순환휴직제를 실시하는 기업에게 비용의 일부를 지원하는 것 이다.


‘재협상 반대’ 근시안적이었다

무기명 장기채권 발행은 실명제 뼈대를 유지하라는 국제통화기금의 요구 와 정면으로 어긋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실명제 일시 유보-무기명 장기채권 발행’ 이외에 국제통화기금의 긴축재정 요구에 꽁꽁 묶여 있는 정부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 움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국제통화기금의 이해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 에 없다.

이런 점에서 국제통화기금과의 재협상 또는 추가협상은 김대중 정부가 반 드시 풀어야 할 난제다. 선거 전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 및 경제관료들의 ‘재협상 반대론’이 근시안적이고 비현실적인 행동이었음은 그뒤 펼쳐진 사태가 잘 보여준다.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에도 금융위기가 악화하자 한 국은행이 특별융자 11조를 단행한 것은 이미 국제통화기금의 요구와 정면 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미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었다는 것 이다. 고용안정 국민협약이 일정 궤도에 오르면, △3% 이하로 잡힌 지나 치게 낮은 경제성장률 △환율변동 폭에 비해 너무 낮게 책정된 물가 △20 %인 이자율 상한선을 40%로 높이라는 요구 등 거시경제지표 재조정은 현 실적인 흐름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김대중 정부와 국제통화기금의 사이가 안 좋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경제철학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철학은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를 본뜬 이른바 ‘민주적 시장경제’다. 이와 관련해 숭실대 경제학과의 한 교수는 “김 대중 정부에서는 한국 자본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시장이 정상적으로 기능 하고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는 경제구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까 지 이어진 ‘박정희 모델’이 파산하고 시장이 그 자리를 메운다는 얘기 다. 이는 이번 한국 자본주의 위기를 국가주도형 성장모델의 한계로 보는 국제통화기금의 시각과 일맥상통한다. 곧 이번 위기는 ‘시장의 실패’가 아닌 ‘정부 실패’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민주적 시장경제’의 또 하나의 측면은 사회보장제도 정비이다. 이는 본격적인 시장기능 활성화와 동전의 앞뒷면을 이룬다. “자동차가 1백km 이상으로 달릴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잘 듣는 브레이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회보장제도 정비는 이런 브레이크 구실을 한다.” 김대중 후보 의 경제정책을 자문했던 한 교수의 말이다. 그렇지만 역시 강조점을 둔 말은 역시 ‘민주적’보다는 ‘시장’이라고 그는 말했다.


인위적 재벌해체 시도는 없을 듯

이에 비춰 김대중 정부의 재벌정책도 결국 ‘공정한 시장’이라는 시각에 서 취해질 것으로 보인다. 인위적인 재벌해체 시도는 없다는 얘기다. 먼 저 선거공약대로 부실채권정리기금을 20조원으로 늘려 기업간 인수·합병 의 제도적인 여건을 갖출 것이다. 이런 틀에서 재벌에게는 ‘공정한 경쟁 ’과 ‘투명한 경영’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것으로 보인다. 국제통화기금 의 요구대로 재벌기업 계열사간 상호출자 및 상호지급보증 금지와 연결재 무제표 작성을 강력히 실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통해 재벌 총수가 약간의 주식 몫을 가지고서도 여러 개의 기업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시 장파괴적인 관행을 줄여나갈 것이다. 또 계열사간 내부자거래를 포함해 불공정한 하도급거래 등은 강력한 규제를 받을 것이다.

김영삼 정부 아래서 지지부진했던 공기업 민영화는 일단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긴축재정에 매인 상황에서 공기업 매각대금은 중요한 정부 자 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국민연금 적립기금 등 각종 연기금을 정부가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 이전의 관행이 되풀이될 우려도 있다. 하지만 민영화 속도는 재벌이 상호출자금지, 연결재무제표 작성 등 투명한 경영에 필요한 조처들을 얼마나 성실히 이행하는지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알짜배기 공기업을 재벌이 소유하는 경 제력 집중의 폐해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재벌의 금융기관 소유는 어쩔 수 없이 허용될 것으로 보인다 . 외국인도 국내 시중은행을 소유하는 게 가능해진 상황에서 재벌의 은행 소유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은행이 재벌의 사금고로 전 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이 마련될 것이다. 이에 대해 새정치국민회의 김원길 정책위원장은 “특정인에게 대출이 편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지금 의 ‘동일인 여신한도 규정’을 대폭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 현재 시중은행의 경우 예금계정과 신탁계정으로 나눠져 있으나 동일인 여신한도 규정은 예금계정에만 적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재벌의 은행 소 유에 대비해 동일인 여신한도 규정을 ‘동일계열기업군 여신한도’로 바 꾸고 이를 신탁계정에까지 확대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YS와 연대하는 시나리오

(사진/경제난국 해결은 단순 대증요법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처방이 가해질 땐 진통도 따를 것이다. 산업체 현장을 방문한 김대중 당선자. )

경제회생과 함께 김대중 정부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묵직한 과제는 지역 주의 해결과 정치개혁이다. 지역주의의 경우 김대중 정부는 당선을 통해 이미 해결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껏 지배권력을 재생산해온 영남 티케이(TK)세력을 중심으로 왜곡된 지역주의가 온존할 위험도 있다. 이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김영삼 대통령과 연대하는 시나리오가 디제이피(DJP)연합 안팎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90년 3당합 당을 계기로 갈라졌던 이전의 민주화세력이 하나로 합치고 ‘동서화합’ 을 이룬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는 앞으로 있을 정계개편 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정치개혁은 좀더 큰틀에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경희대 라종일 교수(정치외교학)는 김대중 정부에 대해 “우리나라 역사상 시민 사회와 국가가 엄격히 분리되는 최초의 정부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전까지는 국가기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사적인 인맥들이 구성되 는 등 ‘국가의 사영화(私營化)’가 이뤄져 왔으나 김대중은 그렇지 않다 는 것이다.

이는 김대중 정부가 하나의 세력이 아닌 이질적인 세력들 사이의 정치적 연합으로 이뤄졌다는 데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민주적인 연립정부 의 전통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정치가 정치세력들 사이의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의 영합(제로섬)게임이었던 데 비해, 김대중 정부의 등장으로 정치는 ‘타협과 조정의 예술’이라는 게 가능해졌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라 교수는 김대중 정부의 등장은 권위주의에서 민 주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민주주의의 공고화’ 단계에 해당한다고 말한 다. 87년 6월민주항쟁에서 시작된 민주주의로의 취약한 이행과정이 마침 내 한 매듭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 따라 김대중 정부의 정치개혁은 이전까지 국가에 집중된 권 한과 자원을 시민사회에 넘겨주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직 업적 정치가가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자신의 시간과 돈을 정치에 기꺼이 투자하는 아마추어 정치가들이 나타나야 ‘돈 안 드는 선거구조’가 만들 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원봉사 지원을 위해 자원봉사기본법을 만들겠 다는 공약을 내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동적인 시민사회 문화를 활성화 하고 변형시키자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김영삼 정부 때처럼 ‘시 민단체 줄서기’라는 폐해를 낳을 위험도 안고 있는 게 사실이다. 시민운 동의 위기가 거론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내각제 불협화음 커질 수도

시민사회 활성화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정치시장의 독과점 구조를 깨는 것이 개혁과 병행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기존 정치세력이 독점하고 있 는 정치시장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다. 이는 선거제도 개혁으로 요약된다. 지정기탁금제 철폐 등의 성과에 도 지난 선거법 개정이 낮은 점수를 받는 것도 결국은 정치시장의 진입장 벽을 높이고 기존 정치세력간 나눠먹기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 배적이다. 이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견해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노 동조합의 정치활동 허용에서 긍정성이 엿보이고 있다.

김대중 정부에 대해 ‘민주주의의 공고화’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직 이른 것처럼 보인다. 변수는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이 공동정권 을 별다른 무리없이 운영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다. 각료 배분 등을 둘러 싸고 자칫 정책수행을 둘러싼 양당의 이견으로 초장부터 국정이 난맥상을 보일 수도 있다. 99년 12월로 예정된 내각책임제 개헌을 앞두고 이런 불 협화음은 더욱 커질 수도 있다.

“양당의 후보단일화는 60, 70년대 산업화를 주도한 근대화세력과 이 나 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민주화세력이 정책적으로 상호보완하 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양당은 이를 통해 좀더 나은 대국민 정책서비 스를 제공할 것이다.” 지난 10월 말 이뤄진 디제이피(DJP)연합의 선언문 일부이다. 정부는 더이상 특정 정치세력의 전유물이 아닌 국민에 대한 서 비스기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공동집권기간 내내 양당이 이 정신을 잊 지 않고 충실히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김대중 정부의 역사적 의의는 충분 하다 할 것이다.

조준상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8년01월01일 제 1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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