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피곤한 라이벌관계 끝나나

(사진/공동의 적이 있을 때 그들은 뭉쳤다. 그러나 결정적 시기엔 분열로 민주화를 지체시키기도 했다.)

집권기간 내내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사람을 만나면 꼭 하는 얘기 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9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세대교체가 이뤄져 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쉽게 말하면 “김대중은 대통령이 돼선 안 된다 ”는 뜻이다.

김대중 당선자도 이런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95년 6월 지방선거 때 “내가 만약 김 대통령이라면 무수히 감옥을 갔다온 민 주동지에게 빈말이라도 ‘내가 한번 대통령 했으니 당시도 한번 할 수 있 다’고 말할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덜 불운했던 김영삼

아무튼 그 “안 된다”던 김대중이 당선됐다. 사실 지난 30년 동안의 한 국 정치사, 혹은 야당 정치사는 이 둘의 애증 드라마라고 이야기해도 크 게 벗어나지 않는다.

김대중은 고난의 화신이었다. 사업가로 자수성가한 그는 54년 제3대 민의 원 선거에 나섰다가 떨어진 뒤 네 차례나 잇따라 낙선했다. 심지어 다섯 번째 출마에서 겨우 당선된 뒤 이틀 만에 5·16 쿠데타가 일어나 의원직 이 박탈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는 정치에 입문한 뒤 테러, 납치, 투 옥, 사형선고, 연금, 용공조작, 지역차별, 상처(喪妻) 등 온갖 모진 일을 당했다. 그는 다섯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김영삼은 운이 좋았다. 거제도 갑부를 아버지로 둔 그는 역시 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한국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고 4 대를 제외하고는 10대 의원까지 승승장구했다. 야당의 원내총무를 다섯 차례나 지낸 뒤 40대 초반에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비록 그 선거에서 김대중에게 지긴 했지만 그 뒤로 사실상 그는 김대중이 부재한 상태의 야 당을 이끌었다. 단 한번도 투옥되지 않았고 가장 가혹한 시기에도 정치활 동 금지와 연금을 당하는 정도였다.

그들은 같은 야당이었지만 진작부터 계열이 달랐다. 김대중은 무소속으로 시작해 민주당에 들어간 뒤 신파의 대표격인 장면 총리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래서 김대중의 논리적이고 차분하며 설득적인 태도는 장면에 게서 배운 것이라고들 한다. 김영삼은 자유당에서 정치를 시작해 조병옥, 윤보선, 유진산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구파의 적통을 계승했다. 그래서 논 리는 부족하나 감각이 좋고 저돌적인 그의 태도가 윤보선의 영향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들이 처음으로 부딪친 일은 1968년 6월 신민당 원내총무 지명전이었다. 당시 유진오 총재는 이미 세 차례나 원내총무를 지낸 적이 있는 김영삼을 제쳐두고 김대중을 지명했다. 김영삼 계열은 반발했고 신민당 의원총회는 인준안을 부결시켰다. 다시 유진오는 정성태를 지명해 2차 투표에서 인준 을 받았으나, 정성태는 그해 11월 스스로 물러났다. 그러자 유진오는 김 영삼을 지명해 만장일치로 인준을 받았다.

가장 유명한 두번째 대결은 70년 9월 열린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신민 당 전당대회였다. 당초 자신의 출마 꿈을 버리지 않았던 유진산은 자신의 후보 지명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를 거부했고 당연히 유진산 계열인 김영삼이 지명을 받았다. 후보는 김대중과 김영삼으로 압축됐다. 1차 투표에서는 유진산과 이철승이 지원한 김영삼이 이겼으나 과반수에 이르지 못해 2차 투표에 들어갔다. 2차 투표에서는 이철승 계열이 유진산 에 반발해 김대중을 밀었다. 결과는 8백84표 중 김대중 4백58, 김영삼 4 백10, 무효 16이었다.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이 전당대회 결과에 김영삼은 깨끗이 승복했고 김대중의 선거 운동을 앞 장서 도왔다. 그러나 김영삼에게는 악몽같은 패배의 기억이었다. 보통 이 전당대회는 김영삼이 김대중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 회자된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 직후인 71년 당수 선출에서는 김대중을 견 제하려는 김영삼이 지원한 김홍일이 김대중을 누르고 당권을 쥔다.

그 말이 옳아도 반대한다?

이들의 경쟁은 결정적인 시기에 불거져 민주화를 지체시키기도 했다. 80 년 서울의 봄과 87년 6월 항쟁 뒤 이들이 벌였던 대권 경쟁이었다. 이 두 번의 실패는 대권욕을 앞세워 두 사람이 분열했을 때 어떤 결과를 낳는가 를 보여준 극명한 예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애증 드라마에 경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신과 전 두환 시대를 거치면서 두 사람은 협력하기도 했다. 79년 5월 신민당 전당 대회에서는 연금 상태에 있던 김대중이 자기 계열의 후보들을 설득해 이 철승과 경쟁관계에 있던 김영삼을 총재로 당선시켰다. 83년 5월에는 미국 에 망명중인 김대중이 김영삼의 단식투쟁에 지지를 보냈고 8·15공동성명 을 발표해 분열을 사죄하고 협력을 다짐했다. 이를 바탕으로 민주화추진 협의회가 발족해 6월 항쟁을 이끌어냈다.

또 3당 합당이 이뤄진 뒤인 90년과 91년에도 두 사람이 협력함으로써 지 방자치제를 이끌어내고 공안정국을 해소했다. 그러나 이런 협력은 두 사 람의 92년 대권 경쟁 뒤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대통령이 된 김영 삼은 오히려 김대중의 정계은퇴에 못을 박고 정계복귀에 반대함으로써 협 력 자체를 부정했다.

김영삼은 집권 뒤 김대중의 의견이라면 그것이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무 시하는 태도까지 보였다. 이를테면 지난 94년 여름 북한 핵을 둘러싸고 김대중이 제시한 일괄타결 방식이 그랬다. 이것은 북한 핵 문제 해결의 적절한 방법으로 미국에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내용이었는데, 김영삼 은 굳이 이를 “철저하고도 광범위한 해결”이라는 용어로 고칠 것으로 요구해 관철시켰다. 심지어 김영삼은 집권 뒤에도 김대중의 집에 대해 사 찰을 계속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김영삼은 95년 8월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경쟁은 끝났으며 나는 어느 누구하고도 경쟁할 입장도 아니고 필요성도 없다.” 김대중과 경쟁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이 말에서 김대중 에 대한 강한 경쟁심을 읽었다. 이제 김영삼이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김대 중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이 두 사람의 경쟁은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 인다.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으며 한국 정치를 뒤흔들어온 이들의 싸 움은 과연 끝난 것일까?

김규원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