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여성

정복자에 안긴 말린체의 말로

아즈텍제국 정복에 나선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 땅에 발디뎠을 때는 3 4살이었다. 바닷가 마을을 차례로 공략하며 아즈텍 계곡의 심장부로 향하 던 코르테스에게 하루는 특별한 선물이 들어왔다. 원주민이 평화를 제의 하며 바친 여인들이었다. 스무명의 인디오 여인들은 난생 처음 보는 흰 얼굴에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험상궂은 백인 남자들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다. 유독 한 여인이 코르테스의 눈에 띄었다. 꽤 아름다운 용모에,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여인이었다. 이름은 말린친 .

말린친은 생김이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무척 총명했다. 그는 지역마다 다 른 원주민 언어를 여럿 알고 있었고, 에스파냐어도 곧 익혀 유창하게 구 사했다. 코르테스는 말린친을 통역 겸 애인으로 삼았다. 말린친은 가톨릭 세례를 받고 ‘마리나’라는 에스파냐식 이름도 얻었다. 그러나 원주민들 은 그를 말린친도 마리나도 아닌, ‘말린체’라 불렀다. 정복자의 여자, 배신자란 뜻이다.

코르테스는 말린체를 ‘이 렝구아’, 즉 ‘나의 혀’라 부르며 매우 아꼈 다. 말린체는 통역뿐 아니라 상담자, 조언자로도 활약했다. 그는 코르테 스에게 인디오의 사고방식, 관습, 종교전통에 대해 설명해 주고 아즈텍제 국 황제가 사는 수도 테노크티틀란(지금의 멕시코시티)의 위치며, 제국에 부속돼 있는 여러 소국이 불만에 차서 황제의 빈틈을 노리고 있다는 값진 정보를 주었다. 코르테스는 말린체가 준 정보와 지식을 토대로 아즈텍 정 복계획을 세웠다. 핵심은 인디오끼리 내분을 일으키도록 유도한다는 것. 계획은 성공을 거둬, 유력한 부족들이 동맹군으로 가담해왔다. 그리 되기 까지 말린체가 능란한 사교술과 외교수완을 발휘했음은 물론이다.

1521년, 결국 아즈텍제국은 에스파냐 군대 앞에 무너졌다. 만약 말린체가 돕지 않았다면 코르테스의 승리는 훨씬 힘겨웠을 것이다. 바꿔 말해, 말 린체가 아니었다면 아즈텍제국은 침입자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말린체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귀족의 딸이었 다고도 하고 공주였다고도 하는데, 어려서 부모와 헤어져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됐다. 물긷기, 옥수수빻기, 옷감짜기 같은 노동을 하며 그는 이곳 저곳으로 팔려다녔다. 그가 여러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일 게다.

코르테스와 만났을 때, 말린체는 이미 삶의 어두움과 인간의 악덕을 실컷 맛본 여인이었을 것이다. 말린체가 동족을 외면하고 낯선 정복자에게 적 극 협력한 이유는 그의 과거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게다. 그가 동족에게서 받은 건 멸시와 학대뿐이었는지 모른다. 비참한 기억과 관련된 모든 것, 동족과 고향까지 그는 말끔히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말린체는 코르테스의 아들을 낳았다. 마르틴이란 이름의 이 아들은 인디 오와 에스파냐 사람의 피가 섞인 최초의 혼혈아, 최초의 메스티소다. 그 런데 코르테스에게는 마르틴이란 이름을 가진 아들이 하나 더 있다. 본처 카탈리나 후아레스가 낳은 아들이다. 세월이 흐른 뒤, 두명의 마르틴은 함께 에스파냐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란을 이끌었다. 아즈텍 정복이 끝난 뒤 말린체는 어찌 되었을까? 자세히 알려져 있진 않으나, 코르테스에게 버림받고 그 부하에게 넘겨졌다 한다.

약 4백년 뒤, 오로스코라는 멕시코의 저명한 화가가 ‘코르테스와 말린체 ’라는 작품을 그렸다. 말린체의 손을 잡은 코르테스가 인디오를 발로 밟 고 있는 그림이다. 말린체와 코르테스 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지금도 멕시코에선 ‘말린체’하면 배신자란 뜻으로 통한다. 그에게 말린친은 돌이킬 수 없는 이름이다.

박은봉/ 역사연구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