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뉴스를 만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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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년 만에 조국을 되찾은 이남이(73) 할머니의 극적인 삶은 올해 후반기 내내 정신대의 아픔을 국민들 뇌리에 되살려놓았다. ‘훈’이라는 이름과 함께 할머니의 사연이 처음 소개된 것은 올해 6월 기업인 황기연(43)씨가 국내언론에 할머니의 존재를 알리면서부터였다.
할머니의 인생에는 한반도의 그늘진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1942 년 18살의 나이로 정신대로 끌려가 일본군을 따라 대만·싱가포르·베트 남을 거쳐 캄보디아까지 2차대전 내내 일본군의 성노리개 노릇을 하며 치 욕스런 삶을 견뎌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몇년 동안 일본군 장교의 현 지처 노릇을 했지만, 그마저 일본으로 떠나버리고 할머니는 다시 홀몸이 됐다. 그 뒤 캄보디아인과 결혼생활을 다시 시작했지만 역시 순탄하지는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전으로 잃은 할머니는 두 딸에 기댄 채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마저 잃어버린 훈 할머니에게 조국찾기의 꿈이 현실로 나타나 게 된 계기는 지난해 캄보디아에 진출한 한국기업인 황씨가 할머니의 손 녀를 만나면서부터다. 할머니의 사연이 소개되자마자 국내 여론은 들끓었 다. 할머니를 고국으로 모셔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마침내 8월4 일 김포공항에 도착해 경남 마산시 진동면 고향을 밟았다. 그뒤 훈 할머 니는 많은 우여곡절 끝에 유전자 감식을 통해 동생 이순이(61)씨까지 만 났다. 그리고 10월6일 대한민국 국적을 얻었다. 55년 만에 잃었던 고국을 찾고 주민등록증을 가진 한국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할머니는 현 재 영구귀국을 준비하고 있다. 할머니의 남은 삶을 돕겠다는 후원회도 결 성되고 있다.
올 한해 훈 할머니는 조국과 고향과 동생 등 잃었던 많은 것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 찾지 못한 것이 있다. 명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 로만 되찾아질 수 있다. 그리고 98년, 훈 할머니는 자신에게 조국을 찾게 해준 그런 뜨거운 애정들이 마지막 명예를 찾는 데도 힘이 돼줄 수 있기 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김창석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8년01월01일 제 189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