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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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게 책이나 모래는 시작도 끝도 없으므로 그의 책은 모래의 책이 라 불린다고 말했습니다.”(‘모래의 책’)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모래 같은 사람이다. “일련의 여 러 흔적을 그리고는 지우는” 작가이고, “그 흔적은 어떤 사람이 이해하 려는 순간 서로 합쳐지는 꿈속의 글자와 같은” 글로 남는다. 그의 글을 읽는 것은 한번도 쓰여지지 않은 것을 읽는 일과 같다.
94년부터 민음사에서 나오기 시작한 보르헤스의 전집이 넷째권 <칼잡이들 의 이야기>와 다섯째권 <셰익스피어의 기억>으로 마무리됐다. 4년에 걸쳐 5권 모두를 우리말로 옮긴 황병하 교수(광주여대 창작문학과)는, “이미 그는 죽었으나 그 스스로가 인생의 후반기에 그토록 확신했던 비연속적 시간 속에서 이미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고, 그리고 앞으로도 존 재하게 될 그 또다른 꿈(삶)들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라고 썼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교육받고 장년기의 20여년을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으로 일했다. 평생을 책에 파묻혀 지낸 그는 단 편 ‘바벨의 도서관’에 응집돼 있듯, 문자와 책과 서가와 도서관에서 우 주를 발견했다. 쉰살 무렵부터 천천히 진행된 시력 상실로 눈을 잃게 된 그는 뇌 속에 저장된 수많은 책과 문자들 사이를 자유로이 산책하며 인간 의 마음을 먼 우주로 던지는 시와 소설과 에세이들을 썼다. 인류의 역사 와 문명, 인간 심리와 이성에 대한 그의 도저한 응수는 흔히 불리듯 ‘환 상적 리얼리즘’이란 한마디로 담기에는 버거운 수많은 미로와 결들을 남 겼다.
이번에 나온 <칼잡이…>와 <셰익스피어…>는 그가 말년에 쓴 짧은 소설 모음이다. 육십세가 넘은 보르헤스의 글들은 말을 생략하고 생각의 머뭇 거림을 쳐버린 ‘단도 직입’과 ‘상상의 극대화’를 보여준다.
“이 총탄은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태초에 카인이 아벨에게 던졌던 돌 이었고,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인류와 함께, 인류의 불가사 의하고 덧없는 운명과 함께 끝이 날 많은 것들이리라.”(‘케네디를 추모 하며’)
“우리들은 불멸에 관한 토론에 몰입한 나머지 불도 켜지 않은 채 밤을 지샜던 거지요… 솔직히 말해 나는 그날 밤 우리들이 자살을 했었는지 아 닌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대화에 관한 대화’)
밑도 끝도 없이 시작했다가 절벽처럼 가파르게 끝나버리는 그의 미니 소 설들은 그 짧음 속에 생의 비밀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 자신의 소설(‘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에 관한 우화’) 한 구절처럼, “문학의 첫 기원은 신화였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그 끝도 신화”인 듯 보인다.
정재숙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1일 제 1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