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논단

박노해와 황석영을 석방하라

김정란/ 시인·상지대 교수

다시 한해가 저물고 있다.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한해였다. 총체적 파탄의 조짐이 나타났다. 88년 이후로 잔뜩 부풀려진 샴페인의 거품이 빠지면서, 우리는 우리가 샴페인이라고 믿고 마셨던 거품이 실은 전근대의 술지게미를 억지로 발효시켜 만들어낸 추악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미증유의 혼란은, 어떤 악운이 한반도를 덮쳤기 때문은 아니다. 모든 것은, 이미 짐작되었던 바의 것이었다. 거의 뻔한 결론이었는지도 모른다. 최근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은, 절차와 원칙을 무시한 어떤 편법도 인간적 사실 안에 확고하게 뿌리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단순한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그 수많은 희생이 필요했던 것일까?


정치주의 또는 엄벙땡주의

한국사회의 가장 커다란 병통은 원칙의 부재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극 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정치행태이다. 되풀이하기에도 지겨운 얘기다 . 다만, 그 원칙부재 정치에 의해서 고통당하는 아까운 사람들을 건져내 기 위해서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뿐이다.

으레 그랬듯이, 여권은 다시 ‘만득이’패를 꺼내들었다. 아무 데나 불쑥 불쑥 객관적 논리의 맥을 끊고 자기논리를 아무렇게나 가져다붙이는 그 만득이 말이다. 이번엔 고영복 교수 간첩사건이 바로 그 만득이 노릇을 했다. 앞뒤 맥락으로 보아서 말이 안 되는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왜 발표시기가 하필 그때라야 하는가, 하는 뻔한 질문마 저도 던질 필요없다. 한차례 또 ‘공안정국’이 휘몰아칠 판이었다는 게 불을 보듯 뻔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그랬듯이 이 땅의 순진무 구한 유권자들의 원시적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 로 활용될 판이었다.

그런 와중에, 문제는 언제나 본질을 비껴서 제기된다. 그리고 뜬금없는 희생자들을 만들어낸다. 이른바 ‘양심수’ 문제가 그것이다. 그렇게 만 득이가 불쑥 튀어나오면, 아예 논의의 논리 자체가 엉망이 돼 버린다. 우 리나라 정치의 무원칙주의를 가장 잘 표현하는 형용사에 따르면, ‘정치 적인’ 문제가 돼 버린다는 말이다. 이 ‘엄벙땡주의’, 또는 ‘정치주의 ’는 모든 정치현안을 비합리적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그리고, 아무 의미 도 없는 고통을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 깔린 개인에게 강요한다.

자, 얘기를 너무 넓게 벌리지는 말자. 우선은,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 아가는 한명의 문인으로서, 내가 가장 가까이 느끼는 문제로 시각을 한정 하기로 하자. 나는 두명의 갇혀 있는 문인들, 박노해와 황석영에 대해 이 야기하려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두 사람을 전혀 모른다. 만난 적도 없고, 문학적으로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내가 추구하는 문학은, 이 두 사람이 직접적으 로 추구하는 문학적 정치성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나는 ‘정치’라는 남 성적 소꿉놀이에 문학적으로는 아무 관심도 없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 은, 문학적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훌륭한 작가들이라는 것, 부 박하기 짝이 없는 가벼운 거품들이 돌아다니는 한국문단 안에서 이렇게 잃어버리고 말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작가들이라는 것, 한 사람의 작가가 자기가 지니고 있는 사상 때문에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것은 말도 안 되 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실제적인 위험이 전혀 없는데도 ‘정치적’ 입장 때문에 정치인이 아닌 문인에게 감옥살이를 시킨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전근대성을 만천하게 공표할 뿐, 국가 차원에서도 아무런 득도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우리 경제의 전근대적 구조가 결국은 외국자본의 대탈주를 불러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문화적 손실만 계속될 뿐

두 작가는 나의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정치적으로는 낭만적 아나키스트일 뿐이다. 그들이 실제로 무슨 일을 했든, 그들의 정치적 행위가 가지고 있 는 실제적인 위험은 이미 사라졌으며, 복잡하기 짝이 없는 탈현대 패러다 임 안에서 아무런 실제적인 영향력도 끼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을 감옥 안에 계속 가두어놓고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이미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다만 두명의 좋은 작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문화적 손실만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문학 계간지 <작가세계>에서는 97년 겨울호 특집을 박노해 시인에게 할당 했다. 그것은 정치적 희생양인 이 작가에게 문인들이 바치는 작은 경외이 다. 또다시 크리스마스를 감옥에서 보내야 할 두 문인을 생각하면, 마음 이 아프다. 나라 경제를 다 말아먹으며, 국민을 허탈감에 빠뜨린 작은 대 통령께서는 진작에 빠져나와 편히 지내고 계신 판국에 말이다. “그분은 빨간색이 아니다”는 만득이 논리를 들이대지 말라. 파란 주걱으로 죽통 을 휘저었으면 죽통을 엉망으로 만든 죄가 면피가 되는가. 파란 장갑 끼 고 도둑질한 도둑은 도둑이 아닌가.

박노해와 황석영을 석방하라. 정치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이름으로 석 방하라.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1일 제 1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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