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김소진의 흔적을 좇아서

(사진/"한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나는 잘못 헛것을 본 양 남자의 현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민성은 아니었다." 함정임씨는 남편 김소진씨와 함께 했던 순간과 부재의흔적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리스신화의 인물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찾고자 지하 세계 하데스를 방문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아내를 구하기 위해 노래의 힘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지상에서도 그 절묘한 연주와 노래로 짐승과 식물, 심지어는 바위와 물 따위의 생명 없는 것들조차 감동시켰던 오르페우스의 노래에 귀신들은 물론 명부의 냉혹한 지배자 플루토까지도 감읍하여 에우리디케를 남편에게 되돌려준다. 도대체 노래가 무엇이기에 감히 죽음의 철옹성조차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일까.

97년 겨울 한국 문단이라는 맥락에서 먼저 죽은 쪽은 남편이고, 이번에는 아내가 그 남편을 되살리고자 노래를 부른다. 지난 봄 요절한 소설가 김 소진과 그의 부인이자 역시 소설가인 함정임(33)씨의 얘기다. 함씨는 죽 은 남편을 그리는 소설 두편을 계간지 겨울호에 동시에 발표했다. <라쁠 륨>에 실린 ‘내 마음의 석양’과 <작가세계>에 쓴 ‘말은 슬프다’는 앞 서 <문학동네> 가을호에 발표한 단편 ‘동행’에 이어지는 일련의 망부사 (亡夫詞)인 셈이다.

그를 찾는 안타까운 몸부림

‘내 마음의 석양’은 화자인 ‘나’가 놓이는 네개의 석양 풍경을 앨범 속의 사진들처럼 스크랩해 놓은 작품이다. 사진들이 보여주는 것은 부재 의 흔적이다. 그 사진들 속에는 이제는 부재하는 남자가 있다. 아니다. 그는,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남자는 없고, 그 남자를 찾는 여자의 안타 까운 몸부림만이 고감도로 인화되어 있을 따름이다. 감포 감은사터의 풀 잔디 위에서,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온 경주역 개찰구에서, 안쓰러워하는 언니와 함께 친정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오빠가 누르는 카메라를 향해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활짝 웃어” 보이는 장기곶 등대박물관에서 … ‘나’가 만나는 것은 죽은 남편 ‘민홍’의 빈자리들이다. 죽은 이는 하나여도 그가 남긴 흔적은 여럿이다. 그 복수의 흔적들은 그러나 혈혈단 신인 그 주인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번번이 중과부적의 패배를 당한다. 이제 그 자신이 하나의 흔적으로 화한 ‘나’는 “민홍의 추억을 간직한 ” 감은사 탑신을 그것이 민홍이기라도 한 양 힘껏 끌어안아 보지만, 와 서 안기는 것은 다만 아득한 허방일 뿐. 그 허방 위로 핏빛 울음과도 같 은 석양이 진다.

“한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나는 잘못 헛것을 본 양 남자의 현현에 소 스라치게 놀랐다. 민성은 아니었다.”

‘말은 슬프다’에서도 화자 ‘나’는 여전히 죽은 남편의 환영을 좇고 또 좇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남편의 이름이 ‘민성’으로 바뀌었다는 것. 아니, 또 있다. ‘말은 슬프다’가 ‘내 마음의 석양’에 대해 보이 는 가장 큰 차이는 이 작품에 ‘나’말고 또 한 사람, 죽음의 흔적을 좇 는 이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신문에서 민성과 ‘나’의 이야기를 읽은 어떤 여자가 문득 전화선 너머에서 요구한다:저를 위로해 주세요, 저는 언니와 형부를 한꺼번에 잃었어요.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이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여야 하지 않 겠는가. 하루의 망설임 뒤에 ‘나’가 그 여자와 만나 한 일이란 “슬픔 의 자매처럼” 함께 우는 것뿐이다.

아픔 이겨내고 타자의 고통 껴안아

소설의 결말은 경주 황룡사터에서 죽은 남편의 흔적을 더듬는 한편, “푸 른 하늘 아래 너는 존재하고 있다”는 친구의 편지 구절을 되새기던 ‘나 ’가 언니와 형부를 잃은 여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 위해 공중전화기 로 향하는 대목이다. 이 장면은 ‘나’가 슬픔과 자기연민의 성채 혹은 감옥에서 걸어나와 타자의 고통까지도 끌어안는 대승의 세계에 들어섰음 을 보여준다. ‘말은 슬프다’는 함정임씨가 사별의 아픔을 이기고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위로의 인사말과도 같다.

그리스신화로 돌아가 보자면,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지상을 향해 나아가던 오르페우스는 ‘뒤돌아 보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고개를 돌리는 바람 에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유리디케를 잃는다. 함정임씨 역시 망부(亡夫) 의 흔적을 좇는 여정에서 끝내 남편을 되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결과 는 또다른 소설이 되었다. 오르페우스는 비록 유리디케를 잃었지만, 노래 를 다시 찾았다.

최재봉 기자/ 한겨레 문화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