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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된 '마음'의 자리란 없다

최근 과학계의 관심은 우주론이나 물리과학에서 생물과학으로 크게 전환 하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은 단지 한 분야에 대한 유행이 다 른 분야에 대한 유행으로 바뀌는 식의 표면적인 변화가 아니며, 그 속에 는 상당히 깊은 내용상의 함축이 깔려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과학의 접근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사물과 현상들을 파악하려는 시도다.

가령 서양의 과학은 데카르트와 뉴턴 이래로 정신과 물질을 철저히 분리 시키는 이원론적 접근방식을 취해왔고 분석과 환원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 는 수리물리적 접근이 지배적인 과학이 되었다. 그 결과 물리학 이외의 다른 과학, 심지어는 자연과학 이외의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도 이러한 과학(물리학)을 흠모했다. 그 결과 생물학도 물리학적 접근방식을 도입하 고, 인문학이나 사회학도 인문과학, 사회과학으로 개칭(改稱)하면서 과학 (즉, 물리학)의 상태를 모방하려고 애써왔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미분법과 적분법은 과학이 환원주의와 양화(量化)로 치달릴 수 있는 탄탄대로를 열어주었다. 그 이전까지는 정량화시킬 수 없 었던 불규칙한 움직임도 미세한 세부로 나누어 다시 합치는 방법을 통해 양으로 계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물을 잘게 쪼개고 부순 다음 , 그 부분들의 특성을 더해 전체의 특성을 알아내려는 환원주의적 접근방 식은 생물학에서 가장 먼저 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대에는 정자미인(精子微人)이라는 개념으로 생물의 발생과정을 설명하 려 했다. 즉, 정자 속에 성인이 될 사람의 모습이 미세하게 축소된 채로 들어 있어서, 성장과 함께 그 난쟁이가 점차 성장해 성인이 된다는 것이 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바탕 웃고 말지만, 이것은 사 물의 본성을 이루는 궁극의 물질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 다. 다시 말해서 어떤 현상의 본질이 아주 작은 알갱이(實在, entity) 형 태로 존재하며, 그 알갱이를 찾아서 설명하면 전체 현상을 설명할 수 있 으리라는 소박한 믿음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식(意識)과 같은 정신현상은 과학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러나 DNA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한 프랜시스 크릭과 같 은 대과학자가 의식의 문제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의 식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 으켰던 크릭의 저서 <놀라운 가설, 영혼에 대한 과학적 탐구>(1994)는 정 작 그가 주장하는 과학적 방법이 의식이나 마음(mind)과 같은 주제를 다 루는 데 어떤 한계를 안고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겠다. 크릭은 그 책에서 우리 몸 속에 의식을 생성하는 자리(seat)가 있다는 식의 접근방식을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정신현상을 일으키는 어떤 기관, 또는 자리가 있지 않은가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얼마 전부터 사람의 몸과 마음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심신상관적 관점이 대두되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각기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되던 신경계와 면역체계, 내분비계 등이 펩티드라 불리는 분자 전령들에 의해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사 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뇌에서만 분비되는 것으로 알려진 엔 도르핀이라는 펩티드가 면역체계에서도 분비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결과 어떤 학자는 더이상 뇌와 신체를 구분하기 힘들다고 말하기까지 했 다. 실제로 창자 안에서도 펩티드가 분비되고 있으며, 그 덕분에 우리는 창자 속에서도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몸 속에 마음의 자리란 없으며, 정신현상은 어떤 기관(뇌)에서 배타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몸이 함께 어우러져 빚어내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의 정신현상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갖는 한계는 지금까지의 과학적 접근의 한계를 대변하는 셈이다.

김동광/ 과학세대 대표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1일 제 1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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