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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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9년
째 계속해온 항공대의 '국립화 요구'는 그 어느때보다 강경하다. 9월12일 시작된 수업거부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국항공대학교(총장 박오화)의 국립 환원 요구로 다시 진통을 겪고 있다 . 항공대는 지난 79년 국립에서 사립으로 바뀐 뒤 거의 매년 국립 환원 요구와 관련해 재단과 갈등을 겪어왔다. 그 때마다 시위, 휴교, 학생 징 계, 구속 등의 학내분규가 잇따랐다. 19년 역사를 지닌 이 갈등 양상은 올들어 예년과 사뭇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대선후보 찾아다니며 ‘공약화’ 요구
이번 사태는 지난 9월22일 항공대 재단 정석학원의 이사장인 조양호 대한 항공 회장이 박오화 항공대 총장에게 정석학원과 한진그룹 산하 인하학원 (인하대 재단)의 재단통합을 통보하면서 불거졌다. 항공대에 대한 재단의 투자능력이나 의지를 불신하던 학생과 교수들에게 이 계획은 ‘항공대 포 기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즉시 학생 비상총회가 열려 학생들의 거리 시위가 벌어졌고 중간고사 거부, 수업거부로 이어졌다. 9월12일 시작된 수업거부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난 11월4일에는 4학년을 뺀 전체 학생들이 집단 자퇴원을 내기도 했다.
학생과 교수, 동문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재단쪽은 “재단을 합병해도 학 교를 통합하는 일은 없으며 항공대의 특수성은 유지할 것”이라며 한발 물러서더니 최근에는 “재단합병을 완전 철회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그 러나 학생들은 이번 기회를 국립 환원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계기로 삼 겠다는 태세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항공전문인력 양성이라는 특수목적을 지닌 교육기관을 과연 사립의 구조에 두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의문이 하나다. 둘째, 사립화 이후 19년 동안 계속된 재단 과 학교쪽의 갈등으로 서로에 대한 믿음이 거의 사라졌다. 학생들은 학교 발전에 대한 재단의 의지와 능력에 대해 완전히 불신하고 있고, 재단은 학생들의 집단행동 뒤에 일부 동문 중심의 불순한 배후세력이 있다고 굳 게 믿고 있다. 재단과 학생이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항공대는 지난 52년 2년제 특설 항공과로 설립됐다. 그뒤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해 현재는 10개 과에 재학생 2천7백여명으로 국내 유일의 항공전문 교육대학이다. 항공운항·관리, 항공기 설계·제작, 항공전자·통신분야 등을 아우르는 10개 학과는 모두 항공전문분야를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 졸업생은 8천여명으로 대부분이 항공 관련 직종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 7 9년 국립에서 사립으로 바뀔 때 제시된 근거는, “80년대부터 신예 항공 기를 생산하겠다는 정부의 항공산업육성 계획에 따라 전문인력을 탄력성 있게 공급하기 위해서는 예산 제약과 획일적 운영이 특징인 국립체제로는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한항공은 국내 유일의 항공산업 관련기 업이었다.
주요시설은 지하에 있다?
그러나 학생들은 사립화 이후 재단의 투자 부족으로 항공대가 몰락의 길 을 걸어왔다고 믿고 있다. 우선 입학생들의 학력 수준이 떨어졌다. 70년 대 말까지만 해도 상위권이었지만 현재는 서울 소재 중위권 대학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투자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 라는 게 학생들의 주장이다.
둘째는 열악한 교육환경이다. 학생들은 강의실이나 학생자치 활동공간이 거의 마련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지내왔다는 것이다. 현재 학교가 들어서 있는 경기도 고양시 화전동 캠퍼스를 두고 학생들은 ‘양철건물 난민촌’ 이라고 부른다. 이 말 속엔 재단에 대한 학생들의 불신이 그대로 담겨있 다. 캠퍼스를 보여주는 게 창피해서 여자친구를 학교축제 때에도 데려오 지 못한 아픈 경험을 말하는 학생들도 많다. 한 4학년 재학생은 놀러온 여자친구가 “항공대가 왜 이래?”하고 물으면 “국가중요시설이라 대부 분 지하에 있다”고 말한다며 웃었다. 중앙도서관은 아직까지 가건물이다 . 학생자치활동 공간이 턱없이 모자라 학생들은 폐차된 버스 안에서 동아 리활동을 해야 했다. 재단이 제시한 마스터플랜만 4년 동안 보다가 졸업 한 이들도 많다.
79년부터 92년까지 13년 동안 지지부진하던 캠퍼스 건설 공사가 지난해 8 월 일부 완공돼 시설문제는 부분적으로 해결됐다. 그러나 현재 완공된 건 물인 공학관, 과학관, 학생회관을 제외하고는 아직 불법 가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게다가 도서관, 대학본관, 체육관 등의 공사는 중단된 상태다 . 최근 경제불황으로 인한 재원조달의 어려움 때문에 공사를 못하고 있지 만 여건이 나아지면 즉시 마무리짓겠다는 게 재단쪽의 설명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재단의 이런 설명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재단의 투자의 지를 불신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재단은 항공대 인수 이후 10여년 동 안 학교 시설물의 증·개축을 금지하는 각종 법규 및 행정조치를 철회하 기 위해 노력을 다해왔다고 주장한다. 개발제한구역과 군사시설보호지역 등의 규제에 묶여 13년 동안 시설 증축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재단은 이에 따라 경기도 안성지역으로 이전을 추진했지만 교육환경이 부적절하 다는 이유로 교수, 직원, 학생, 동문회 등 항공대 구성원들의 반대로 무 산됐다고 전했다.
“해양수산대·철도대는 국립인데…”
(사진/자퇴서를 제출하는 학생들. 4학년을 뺀 모든 학생들이 냈다. 일부 졸업생들 사이에는 학적 포기 움직임마저 일고 있다. )
재단은 또 79년부터 96년 말까지 18년동안 투자액수는 모두 5백64억원으 로 적지 않은 규모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학교쪽은 5백64억원 가운데 84%인 4백18억원은 92년 항공대 발전계획이 세워진 이후 최근 5년간 투자 액이고 79년부터 91년까지 13년 동안은 1백46억원만 투자됐다고 전했다. 한해 평균 11억2천여만원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한편 학생과 교수들은 재단의 투자능력과 의지 이외에도 사립화 당시와 현재는 항공산업을 둘러싼 환경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사립 형태를 유 지시키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주장한다. 현재 운송과 제작 두축으로 크게 나뉘어 있는 항공산업에 진출한 업체가 10여개로 늘어난 상황이며 항공전 문업체만도 대한항공 이외에 삼성항공, 대우중공업, 현대우주항공 등으로 늘어나는 추세라는 지적이다. 학생들은 여러 항공전문업체들 가운데 한 기업이 항공전문인력 양성이라는 공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셈이다. 항공대 총학생회장 신승하씨는 “해양수산대나 철도대학은 모두 국립인데 하늘을 책임지는 항공대는 왜 사립인지 모르겠다”며 “21 세기 전략핵심산업인 항공산업을 책임질 전문인력의 양성을 한 기업에 맡 긴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학교쪽은 항공대 사태가 다른 사립대처럼 재단비리나 재단의 학교운영 간 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국가적인 목표를 수행하는 교 육기관의 운영을 민간재단에 맡기는 게 과연 적합한가의 문제를 둘러싼 시각차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사실 항공대생들은 재단의 의지부족 등을 제기하기에 앞서 항공전문인력 양성정책이 전무한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 한다. 때문에 이들은 각 대선후보들에게 항공대의 국립환원뿐만 아니라 항공청의 신설, 항공산업의 국가적 육성 등을 공약화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표류하는 항공우주정책
학생과 교수들은 우리나라 항공산업에 대한 진단을 토대로 항공대가 국립 으로 환원돼 질높은 전문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국의 항공기 제조기술 수준은 세계 20위권이며 이는 대만, 멕 시코, 인도네시아, 브라질보다 뒤떨어진다. 항공대 경영학과 허희영 교수 는 “단순조립 기술은 지난 20년간의 기술축적으로 비교적 안정돼 있지만 설계와 제작을 위한 핵심기술능력은 대단히 낙후됐다”라면서 “우리의 경제규모를 고려할 때 항공산업 진입시기는 매우 늦은 실정이며 항공기산 업 규모에서 대만(3.7배), 이스라엘(9배), 스페인(4.7배), 브라질(3.2배) 보다 작다”고 밝혔다. 허 교수는 또 “현 정부 초기에 추진했던 1백인승 급 중형기 개발을 위한 국제공동사업이 최근 수년간 미뤄짐에 따라 경제 손실이 엄청났다”면서 “10년전 법규로 규정된 ‘항공우주개발기본계획 ’이 지금껏 수립되지 않고있는 등 항공정책이 정부에 의해 표류되고 있 는 느낌”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전문인력의 부족과 자질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항공사고의 80% 이상이 인적 요소에 의해 일어난다. 우리나라의 전체 조종사 가운데 약 1 4%인 2백90명이 외국인이다. 이같은 추세는 급증하는 항공운송수요에 따 라 계속 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항공대 국립 환원 주장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주무부처인 교육부 당국자는 학생과 교수들의 국립 환원 요구에 대 해 “정부의 모든 정책이 민영화·자율화로 가고 있는 추세와 완전히 어 긋나는 것”이라며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특수목적대학 이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 당 국자는 “항공관련 학과는 다른 대학에도 있다”고 말해 학생들이 주장하 는 항공대의 위상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항공관련 학계에서는 항공대의 국립 환원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서 울대 항공우주공학과 김승조 교수는 “항공대의 국립 환원에 대해 원칙적 으로 동의한다”며 “항공전문인력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된 항공대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 국립이 되면 비용 때문에 개별기업이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힘들었던 관제나 운항 부분의 전문인력을 대규모로 키울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 항공우주공학과 등 항공 관련학과가 설치 돼 있는 대학은 14개 정도이다.
“국가부담, 당장 많지 않다”
학생과 교수들은 항공대가 국립으로 바뀌더라도 당장 국가가 부담해야 할 부분은 많지 않다고 말한다. 항공대 역시 다른 사립대학들과 마찬가지로 학교재정의 등록금 의존율이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장 국립 환원을 해 도 국가가 부담할 액수는 1년에 30억∼50억원 안팎이라는 계산이다.
김창석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1일 제 1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