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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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공부하다가 길이 막힌 한학 연구자들은 그를 찾아온다. 한적을 보는 눈이 탄탄한 데다, 온갖 자료들을 가늠하고 엮어내는 눈썰미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곰팡내인 것도 같고, 싸구려 잉크 냄새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된 콩기름 향내인 듯도 하고…. 김영복(43)씨에게선 그런 냄새가 난다. 이제 골동품 이 돼버린 고서점, 그게 바로 그의 일터라는 생각에 미치면 그 향내는 얄 밉게도 옛사람이 말하는 서권기(書卷氣)라는 근사한 표현을 찾는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2층에 있는 ‘문우(文友)서림(02-7 30-5408)’에 가면 누런 똥색으로 바랜 한적(漢籍)과 수십년 묵은 옛날 책 1만여권에 둘러싸여 있는 그를 만날 수 있다. ‘글벗책방’이란 우리 말 간판이 책과 동무를 좋아하는 그와 함께 손님들을 반긴다.
‘고서 보는 눈’을 키운 통문관 시절
“고서점의 부흥과 경제성장은 같이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 앉아 있 으면 신문 안 봐도 나라살림이 얼마나 어려운가 뼈저리게 느껴져요. 지금 고서 경기가 바닥입니다. 언제 올라갈지 알 수 없을 만큼 수렁에 빠졌어 요. 책을 많이 읽는다는 건 자기 일에 활력이 있다는 증거죠. 바쁜 사람 들이 더 책을 많이 보거든요. 일본 간다의 고서점 거리가 북적대는 건 그 들이 자료 챙기기에 극성이란 말도 되지만, 그만큼 선진국으로 고도성장 할 때 고서점이 함께 발달했다는 얘기지요.”
강원도 원주 산인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74년께 인사동에 들어와 고서점에서만 20여년을 넘게 일했다. 고서점 업계의 터줏대감인 통문관에 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공부하는 맛도 좋았지만 그럴듯한 물 건들도 많이 나오고 거래도 활발해서 재미가 쏠쏠했다고 한다.
“통문관 영감님이 우리나라에서 고서 보는 눈은 최고지요. 그렇다고 뭐 특별한 걸 가르쳐주시진 않았어요. 그저 어깨 너머로 배운 거지요.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무던했지요. 그런 훈련으로 고서점에서 일한 건 아마 이 세대로서는 마지막이 아닌가 싶어요. 어려서 한 한문 공부를 밑천 삼 아 하루에 한권꼴로 책을 독파했는데, 가끔 책에 코를 파묻고 있다가 손 님 들어오는 걸 놓쳐 영감님께 혼이 나곤 했지요.”
그가 영감님이라고 부르는 이는 한국 고서업계의 산증인인 통문관 대표 이겸노(88)씨다. 김영복씨는 그 밑에서 한적 보는 법과 물건 다루는 법 등을 배웠다. 70년대 후반, 통문관은 한국학 학자들의 연락사무소 구실을 했다. 한국어문교육연구회는 통문관 3층에 사무실이 있었고 국어국문학회 , 진단학회, 역사학회, 복식학회, 민속학회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한국학 의 부흥을 꾀했다.
“그때, 그곳에서 좋은 어른들을 많이 뵈었죠. 일석 이희승, 남광우, 이 가원 선생 등 한국학의 대가들을 모셨으니 그분들이 다 제 스승이었던 셈 입니다. 영감님은 자꾸 학교에 보내줄 테니 한국학쪽으로 공부를 해보라 고 부추기셨지만 그건 제 운명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문자 속은 좀 깨 우쳤지만 굳이 학교에 들어가서 남의 밥그릇 빼앗는 게 싫더라구요.”
한국학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 시절 뿌리를 내렸다. 김영복씨를 잘 아는 이들은 그가 수많은 한국학 전공자들에게 나침반 구실을 했다고 말한다. 한적을 보는 눈이 탄탄한 데다, 온갖 자료들을 가늠하고 엮어내는 눈썰미 가 뛰어나 공부하다가 길이 막힌 연구자들이 등대를 찾는 심정으로 그에 게 달려오곤 했던 것이다.
“지금 한국학이 내리막길로 들어선 건 정부 정책에도 문제가 있고, 이걸 해가지고는 먹고 살기가 어려운 세태에도 원인이 있지만, 사실 제일 큰 걸림돌은 한국학을 공부하는 전공자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실학이 좀 된 다 싶으면 실학으로 우르르 몰리고, 고려사가 된다면 또 너도나도 고려사 하고, 도대체 잘 팔리는 것만 하면 나머지는 어쩝니까. 전체가 골고루 연 구돼야 한국학의 대중화도 이뤄지는 건데, 매일 시작하다가 끝나버리죠. 한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것만 하고 종치니까, 뒤에 오는 후배들은 또다시 시작인 겁니다. 기초 번역이 안 돼 있으니까 논문이 아무리 쏟아 져 나와도 모래밭에 물붓기처럼 자국만 나고 마는 거지요.”
김영복씨의 한국학에 대한 비판은 애정이 큰 만큼 더 신랄하다. 왜 체육 진흥회는 있는데 한국학 진흥회는 없느냐는 통탄은 가슴이 찡할 만큼 절 절하다. 한문을 제대로 배운 사람들이 살아있을 때, 고문서 정리도 하고 원전 번역도 쌓여야 한다는 말도 귀기울일 구석이 많다. 한문은 하면 할 수록 어려워서 뒷심이 부친다는 그는 ‘우리 고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아이와 함께 읽는 한자 1800자’ 같은 대중적인 책을 쓰는 꿈을 키 우고 있다.
그는 90년 3월, 통문관에서 인사동 네거리쪽으로 내려가는 길 건너편에 가게를 내고 통문관 영감님으로부터 독립했다. 관훈동 71번지 3평쯤 되는 그 작은 책방에서 그는 인사동에 나오는 벗들과 글을 논하고, 술을 마셨 다. 4∼5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그 찜통 같은 책방이 인사동의 명소였다 는 건, 이곳을 들르던 손들의 면면이 말해준다.
역마살 탓에 책방 오래 갈까
“민병산 선생님껜 인간이 살아가는 올바른 길을 배웠습니다. 영문학자셨 던 조용만 선생께는 일제에서 구한말에 걸친 중인 계통의 이야기를 들었 지요. 전 박물관장 김재원 박사, 한학자인 김관호씨로부터도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최남선 선생에게 책을 대던 김용수씨는 ‘책장사 잘하 려면 공부 많이 해야돼’라고 선배로서의 조언을 주셨지요. 노인네들을 참 많이 모셨는데, 그게 다 제 인생 밑천이 됐습니다.”
지난 9월, 지금 자리에 재개업을 한 셈인데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 을지 그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다. 역마살이 끼었는지 며칠 책방을 지키고 난 다음이면 훌훌 떠나야 숨통이 트이는 그는 민학회 총무로서 지방 답사 를 잘 나간다. 술은 말술, 더러운 꼴은 눈뜨고 못보는 성미라 한번 마음 을 준 친구는 오래가지만 적도 많다. 70년대 후반부터 사귀기 시작한 고 미술 전문점 겸 출판사인 학고재의 우찬규 사장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 학고재(學古齋)는 원래 김영복씨가 살림을 나면 가게 이름으로 하려고 작정해 두었던 것인데, 화랑을 내면서 상호를 못 정해 고민하는 우 사장 에게 김씨가 “그럼 이걸 쓰시게”하고 선뜻 밀어준 내력이 있다.
“뭐 좋은 게 나온 것 있나?” 승가대 도서관장인 종범 스님이 들어선다. 종이 지질을 묻고 있던 유부현 교수(대진대 서지학과)는 김씨가 컴퓨터 같은 답변을 접으며 “잘 모르겠는데…”라고 말끝을 흐리자 “형님이 모 르면 누가 알아요” 하고 눈을 찡긋했다. 너무 많은 이들이 그를 필요로 하기에 당분간 김영복씨는 제 맘대로 가게 문도 못 닫을 것같다.
사진 정진환 기자
이번호부터 ‘인물탐험’의 필자가 바뀝니다. 그동안 수고한 유강문 기자 는 <한겨레> 경제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1일 제 1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