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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탄 건너 불구경 아니다

(사진/일본증권업계 4위 야마이치증권사. 대장성에서 자진폐업신고를 내 사실상 파산을 맞았다.)

“일본의 금융기관들이 잇따라 파산한다. 일본 국내에 부실채권을 잔뜩 안은 은행들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동남아와 미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 에 흩어진 해외 채권과 자금을 대대적으로 회수한다. 특히 일본 금융기관 들이 국채만도 3천억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으로부터 채권을 대대적으 로 쓸어가면서, 이자율이 오르고 주식값이 폭락하며 뉴욕 증시는 불길한 조짐을 보인다. 최근 10월에도 최대의 폭락을 기록했던 미국 증시는 일본 금융기관들의 자금회수 여파와 투자자들의 불안심리까지 겹친 ‘아시아 쇼크’로 바닥이 보이지 않을만치 추락한다. 뉴욕 증시의 폭락소식은 바 다 건너까지 전해져, 유럽과 홍콩, 중남미 등 전세계의 증시가 동반 하락 하면서 전세계에서 금융수축이 일어난다. 이자율이 뛰면서 자금은 얼어붙 고 금융기관과 기업이 잇따라 무너지고 실업자가 폭증한다. 세계는 시계 바늘을 거꾸로 타고 30년대로 되돌아가 세기말의 공황에 빠져든다….”


전체 금융기관 부실채권 1백조엔대

이는 일본의 금융위기가 전세계로 파급될 경우 우려되는 최악의 시나리오 다. ‘상상 가능한 최악’인만큼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홋카이도다쿠쇼쿠은행, 산요증권, 야마이치증권, 도쿠요시티 은행 등 한달 동안에만 4개의 금융기관이 잇따라 ‘파탄’을 겪으면서 일 본에서는 금융에 대한 불안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일 본 내 금융자산을 매각처분하면서 주가·환율·채권이 급락하고 있어, ‘ 트리플 약세’란 말과 함께 “일본 것이라면 무조건 팔아치우고 철수한다 ”는 뜻의 ‘일본매각’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11월 들어 닛케이지수 는 2년 만에 처음으로 1만6천대가 무너졌으며, 엔화 가치도 5년 만에 최 저인 달러당 1백27엔을 넘어섰다. 닛케이지수 1만5천대가 무너지면 20대 은행 중 18개 은행이 자산손실로 자본비율을 위협받을 것으로 알려진 가 운데, 전문가들 사이에선 ‘닛케이 1만2천, 환율 1백30엔대’까지 거론되 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외국인 투자자들의 철수를 유발한 일본 금융불안의 주범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양의 부실채권이다. 그러나 한국 은행들의 부실채권이 정경유착과 정책금융에서 기인한 데 비해, 일 본 금융기관들의 부실채권은 6∼7년 전의 거품 붕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

일본 금융기관들은 경제가 장기 호황을 구가하던 시절 부동산과 각종 금 융자산 등을 담보로 자금을 대출하거나 직접 투자에 나서기도 했으나, 거 품이 꺼지면서 그간의 방만한 경영으로 생긴 악성채무로 몇년 동안 시름 시름 앓아왔다. 이런 부실채권은 지난 3월 현재 일본의 20대 은행들이 발 표한 규모만도 19조3천억엔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이조차 실제보다 과 소평가된 것”이라며 20대 은행 부실채권 규모를 50조엔 이상, 전체 금융 기관의 부실채권 규모를 1백조엔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동남아의 통화위 기까지 겹쳐 아시아 지역에 모두 30조엔의 대출잔고가 있는 일본 금융기 관들의 부실화를 더욱 부채질한 것으로 분석된다. 일본경제의 장기불황도 이미 거품이 꺼져버린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 디플레를 부추겨, 금융기관 의 부실채권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실물 부문 기업의 경영파탄과 금융기관의 부실이 얽혀 투자자들이 빠져나가면서 환율이 급락해 심각한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란 점에서 형편이 다르다. 적어도 당장 연말 로 다가온 외환결제를 위해 급전을 구해야 할 처지에 놓인 한국만큼 절박 한 외환위기를 겪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주변국들은 엄청난 규모의 해외채권을 보유한 일본 금융기관들이 자금부족을 메우기 위해 이를 회수해 감으로써 세계적인 금융수축을 불러 일으킬 가능성을 우려한다. 한국의 외환위기가 단기투자자들의 불안을 자 극해 브라질 같은 다른 개도국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국제적 사안이라면, 일본의 금융불안은 전 지구적 금융공황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초국적 사 안인 셈이다.


잇단 증권사 파탄은 빅뱅으로 가는 통행세

다행히 일본은 한국과 또 한가지 점에서 다르다. 일본 유권자들의 건망증 이 상대적으로 덜 심해서인지, 경제에 대해 책임을 진 정치인들이 최근 들어 금융구조조정(빅뱅)에 박차를 가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이미 금융기관의 통폐합이 예상되는 빅뱅 과정에서 선결돼야 할 부실채권을 조기처리하기 위해 공적 자금을 동원할 것과, 예금자 보호를 위한 정부보증채 발행 방침 등을 결정한 것 으로 알려졌다. 체질이 허약한 금융기관을 도태시키는 한편, 예금자들을 보호함으로써 구조조정에 뒤따르는 불안을 최대한 줄인다는 것이다. 최근 야마이치증권 등의 파탄도 “금융기관의 연쇄도산은 빅뱅으로 가는 길에 치러야 할 통행세”라는 단호한 결의를 드러낸 신호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기불황을 겪고 있는 일본 재계로부터 경기진작을 위한 감세를 요구하는 압력도 늘고 있다. 일본 정부로서는 부실채권 정리와 예금자 보 호를 위한 방대한 재원마련과 함께, 각종 규제철폐 등 다른 부문의 재정 지출을 바짝 졸라매는 ‘재정개혁’이란 어려운 짐까지 떠맡아야 할 형편 이다.

임민 기자/ 한겨레 국제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1일 제 1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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