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초점

검찰, 마녀사냥에 눈멀었나

(사진/이장희 교수.)

당국의 공안몰이가 고영복 서울대 명예교수 간첩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거칠어지고 있다. 서울지검 공안1부는 지난 11월25일 <나는야 통일1세대>라는 제목의 초등학생용 통일교육교재를 엮은 한국외국어대 이장희(47·법학과) 교수와 이 책을 편집한 천재교육사 편집장 김지화(26·여)씨에 대해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제작·배포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출판된 지 2년된 통일원 추천도서인데…

이 교수에 대한 검찰의 영장청구는 출판된 지 이미 2년이나 되는 책의 내 용을 새삼스레 문제삼았다는 점에서 우선 놀랍다. 게다가 이 책이 통일원 자문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기관지 <민주평통>에 의해 “구호로서 의 맹목적인 통일이 아니라 합당한 통일교육의 필요성이라는 인식 아래 통일을 완성시키는 세대가 될 어린이들이 알기 쉽도록 통일에 대해 중립 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지난 2월 초부터 4개월 동안 통일원이 문화방송 TV와 라디오를 통해 내보낸 통일캠 페인의 중요한 참고자료였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같은 국가기관인 통일 원과 검찰의 통일관이 정면에서 대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 이다.

이 책을 둘러싼 이적성 논란은 <월간조선>이 지난 7월호에 “추적, 통일 원의 이상한 통일캠페인- 통일되면 수도와 나라꽃이 바뀌나?”라는 제목 의 기사를 실으면서 처음 불거졌다. <월간조선>은 이 기사에서 통일원의 통일캠페인이 북한의 연방제통일을 연상케 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는 내용을 집중 보도하면서, 광고대행사가 광고를 만들면서 참고자료로 사용 한 이 책에 대해 사상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다.

이어 7월21일 민족안보구국통일연합회(회장 오제도)등 50개 사회단체는 < 월간조선>의 보도를 근거로 “이 책은 통일이 되면 우리의 국호, 국가, 국기, 국경일 등이 바뀌어야 한다는 등 헌법에 나타난 대한민국의 정통성 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면서 권오기 통일원 장관의 퇴진과 통일원 해체, 이 교수의 구속 등을 주장하는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또 통일원과 이 교 수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나는야…>는 “(통일이 되면) 나라이름은 무엇으로 바꿀까?” 등 27가지 주제로 초등학생들이 직접 쓴 원고를 그대로 실은 부분을 중심으로 하여, 이 교수가 해설한 부분, 편집장 김씨가 북한의 실정을 요약해 쓴 ‘북한 이야기’ 등 3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책의 내용에서 검찰이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나라이름, 나라꽃, 수도, 공휴일 등이 어떻게 바뀔까?’를 다룬 부분이다. 우익단체들은 이에 대해 “나라이름이나 나라꽃을 바꾼다는 것 은 북한주도의 통일이나 연방제통일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상황을 상정 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또 이 교수가 “우리는 남북한이 어떠한 통일과 정을 밟아나가느냐에 따라 통일 뒤의 사회가 크게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식이냐 북한식이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나요? 어떤 체제가 되든 자유, 인권, 사회복 지를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말이에요”라고 쓴 부분에 대해서도 혐의를 씌우고 있다. 그러나 통일국가의 나라이름 등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는 그 동안 공공연한 논의의 대상이었고, 통일국가의 미래상을 “자유, 인권, 사회복지를 귀중히 여기는 자유민주주의체제”라고 밝힌 사람은 바로 김 영삼 대통령(94년 광복절 경축사)이었다.


상상을 초월한 트집

검찰이 혐의를 두고 있는 또다른 부분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비교해 서술한 부분이다. 이 교수가 “자본주의는 누구든지 노력한 만큼 잘 살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자는 거예요. 하지만 이 사회체제는 지난 역사에서 보면 큰 단점이 드러났어요.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욱 가난해졌거든요”라고 쓴 이 구절은 따로 떼놓고 보면 자본주의를 일 방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교수의 글은 이 렇게 이어진다. “오랫동안 자본주의 나라들과 힘을 겨루던 사회주의 나 라들은 지금은 거의 무너졌답니다. 몇년 전부터 소련과 동독을 비롯한 많 은 사회주의 나라들이 자본주의로 바뀌었지요. 사회주의 나라에서는 직장 과 집을 정부가 다 구해주니까 사람들이 일을 대충대충 하고 노력하지 않 았던 거예요. 그러니, 노력하면 그만큼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자본주의체제를 공산주의체제는 결국 이길 수가 없었던 거 죠. 그래서 공산주의의 소멸을 세계사의 추세라고 할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아침은 빛나라…”로 시작되는 북한의 애국가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으로 시작되는 김일성 찬양 노래 전문이 실려 있다는 점도 이적 혐의를 받고 있다. 우익단체들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 를 실었을 뿐, 김일성이 전쟁범죄자라는 사실 등은 책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다”며 “이는 북을 찬양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펴왔다. 이 교수는 이 에 대해서도 책의 같은 쪽에서 “(북한의) 음악교과서 맨 앞에 애국가와 함께 실려 있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는 평소 작은 행사 때라도 반드시 따 라부릅니다. 곡도 탁아소와 유치원 때 이미 배우지요”라고 쓴 사실을 거 론하면서, 이런 사실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북한의 1인독재체제를 알 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되고 있다고 반박했다.

통일원쪽은 당초 논란이 확산되자 이 교수를 통일원 자문위원에서 해촉하 는 등 옹졸한 대응을 했지만 “이적성 문제는 없다”는 일관된 태도를 취 하고 있다. 권오기 통일부총리는 “군데군데 오해의 소지와 표현상의 문 제점이 노정되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또 서울지법 민사50부도 “<월간조선>의 보 도가 이 교수의 명예를 훼손한 점이 인정된다”며 <월간조선>12월호에 2 쪽에 걸쳐 반론보도문을 싣으라면서,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매달 2천 만원씩을 지급하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왜 힘없는 개인에만 혐의 씌우나

이번 검찰의 영장청구에 대해서도 서울지법 홍중표 영장전담판사는 국가 보안법 위반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실질심사를 거친 끝에 “책의 전체적 인 맥락과 논조가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찬양·고무하는 것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등 이적성을 단정하기 어렵고 증거인멸 및 도주우려가 없다 ”는 이유로 기각했다.

그러나 검찰은 영장을 재청구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교수 는 이에 대해 “책이 출판된 뒤 언론사는 물론, 정보기관 정부기관 및 내 외통신 등에까지 책을 보내 그동안 충분한 검증과정이 있었다”면서 “새 삼스레 검찰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현재 북한을 보는 우리의 시각은 7·4남북공동성명이나 남북기 본합의서의 화해·협력정신과 북한을 궤멸시켜야 할 적으로 바라보는 실 정법 사이의 괴리가 너무 크다”고 지적하고 “어쩌면 통일을 위해 우리 에게 지금 시급한 것은 남북대화보다 남남대화”라고 말했다.

검찰이 이 교수를 구속하든 불구속기소하든 유·무죄 여부는 결국 법원의 판단에 맡겨질 것이다. 그러나 애초 <월간조선>과 우익단체들이 문제삼은 통일원의 캠페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수사결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면서도, 검찰이 유독 이 교수에게만 혐의를 씌우는 것은 공안몰이를 위 해 힘없는 개인을 희생하려 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법조 계에서도 “검찰이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영장을 청구했다”는 게 중 론인 것에 비춰볼 때 이 사건은 “개방화, 민주화의 진척으로 그동안 설 자리를 빼앗겨왔던 공안세력이 최근의 공안분위기에 편승해 입지를 최대 한 확보해보려는 시도다”라는 비난에서 비켜가기 힘들 것같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1일 제 1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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