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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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공부 잘하는 '소수'가 억울하다고? 만약 시험문제가 작년처럼 어렵게 출제됐다면 '다수'인 중하위권 학생들은 다시 절망했을 것이다.)
“올해 수학능력시험이 너무 쉬웠다.” “심지어 중학생이 풀 수 있는 문 제도 나왔다.” 유명 입시기관들은 지난 11월 수능전쟁이 끝난 뒤 이렇게 분석했다. 몇몇 고등학교를 표본으로 가채점을 한 결과 수능점수가 지난 해보다 45∼55점이나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올 수능시험이 지난해에 비해 쉽게 출제된 건 사실인 것 같다. 언어영역 과목만 해도 작년에는 대부분의 지문이 교과서 밖에서 출제됐다. 하지만 올해는 교과서 안의 지문이 전체의 37.5%를 차지했다. 수험생 입장에서는 눈에 익은 지문이 많이 출제됐기 때문에 쉽게 느꼈을 것이다. 수험생들이 가장 어려워 하는 수리탐구I(수학) 과목은 교과서에 나온 예제 수준의 문 항이 포함되기도 했다. 게다가 수리탐구I은 지난해의 경우 수험생들이 혀 를 내두를 정도로 어려웠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올해는 더욱 쉽게 느꼈을 법하다.
어려웠던 지난해가 오히려 탈
문제는 그 다음이다. 수능문제가 쉽게 출제되자 각 사설 입시기관이나 언 론은 호들갑을 떨었다. 마치 엄청난 사회적·교육적 혼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식이었다. 한쪽에서는 “난이도 조정에 실패했다”고 십자포를 퍼부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중상위권 점수대층이 두터워지면서 치열한 눈치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고 우려했다. “고득점 재수생을 양산하 게 됐다”는 단골메뉴도 빠지지 않았다. 쉽게 출제된 수능시험이 모든 교 육문제의 온상이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다.
하지만 대개의 교육전문가들은 올 수능의 난이도가 마치 문제아인 양 떠 드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말한다. 찬찬히 뜯어보면 오히려 지난해 수능 이 너무 어려웠던 게 탈이었다는 것이다. 지난해의 경우 4백점 만점에 3 백점 이상 고득점자는 1.65%에 불과했다. 또 수험생들의 평균점수는 1백 점 만점으로 환산해 42.68점에 지나지 않았다. 평균성적이 50∼60점에서 형성되도록 하는 일반적인 목표치와 크게 어긋난 셈이다. 특히 수리탐구I 의 경우는 1백점 기준으로 환산해 평균 성적이 28.65점밖에 나오지 않아 바닥을 기었다. 중하위권쪽으로 점수대가 쏠리는 아주 비정상적인 분포를 형성했던 것이다.
올해의 경우 수능점수 채점이 완전히 끝나봐야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추세라면 ‘정상적’일 거라는 게 관계기관의 분석이다. 학생들의 성적에 가장 영향을 주는 수리탐구I을 1백점 만점으로 환산해 평균 50점이 되도 록 문제를 출제했고, 다른 과목도 평균점수가 50∼60점대에 분포하도록 조정했다는 것이다.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는 본고사가 없어진 첫해였다. 따라서 대학에 상위권 학생들의 변별기준을 제공하기 위해 어 렵게 출제한 측면이 있다. 게다가 수리탐구I 영역에 주관식 문제가 처음 으로 도입돼 학생들이 어렵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수능성 적 분포가 제자리를 찾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고 말한다. 작년 수능이 지나치게 어려웠던 것이지, 올해 수능이 지나치게 쉬웠던 게 아니 라는 것이다. 올해는 난이도 조정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중상위권 점수대층이 두터워지면서 치열한 눈치경쟁을 피할 수 없 게 됐다”는 말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상위권대의 변별력은 지난해보다 훨씬 떨어질 것이다. 상위권 학생들은 공부한 만큼 성적이 나 오지 않았다고 ‘억울해’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반대의 논 리도 성립된다. 시험문제가 작년처럼 어렵게 출제되면 ‘다수’인 중하위 권 학생들이 억울해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상위권 학생의 변별력 이 높았던 작년에도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학과’를 가기 위해 치열한 눈치경쟁을 벌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학 선발기능 다양하게 보완해야
수능시험의 구실을 그저 대학생 선발기능의 ‘만능 잣대’로만 한정지어 생각하면 이런 딜레마가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를 쉽게 낼 수도, 그렇다 고 어렵게 낼 수도 없는 것이다. 애초 수능시험은 고교에서 배운 교과내 용을 갖고 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는지를 말그대로 시험하자는 취지로 출 발했다. 하지만 학부모나 학생, 대학이나 사회는 수능시험이라는 잣대 하 나만으로 전국 53만명의 고등학생들을 서울대, 연·고대 순으로 정확하게 줄세워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똑같은 점수에 수천, 수만명의 학생들이 몰리고 1∼2점 차이로 대학의 당락이 결정되는 데도 말이다.
수능시험은 선발기능 이외에도 고교교육의 정상화라는 또다른 기능이 있 다. 수능시험의 성격에 따라 고교 현장 교육이 커다란 영향을 받는 것이 다. 이수호 서울시 교육위원은 이런 관점에서 수능시험이 올해 정도로 쉽 게 출제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수능시험을 어렵게 출제하면 일부 상위권 학생들의 변별력은 높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고교 교육이 일류대학에 진학할 소수의 학생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파행을 거 듭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상위권 학생들을 포함한 모든 학생들의 정상적 인 학교생활이나 취미생활은 점점 더 성적에 종속될 게 뻔합니다.”
수능문제는 쉽게 출제하되 선발기능은 다양하게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능시험은 일종의 자격시험처럼 비슷한 점수대의 중상위권 학생들을 많 이 양산할 것이다. 이들 가운데 대학이 ‘입맛에 맞는’ 학생들을 선발하 도록 자율권을 주는 것이다. 영어나 수학 성적으로 선발하는 게 아니다. 지금 막 실험중인 논술, 면접, 고교교장 추천제, 그 외에 각 대학이 요구 하는 가중치를 대학별 특성에 맞게 개발해 종합적으로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완벽한 제도는 없다. 다수의 학생들이 정상적이고 자유로운 학교생활을 누리도록 하는 커다란 원칙이 중요한 것이다.
수능시험의 걸림돌이 또 있다. 올 수능시험이 쉬웠지만 내년에도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출제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출제 한달 전부터 대학교수와 고교 교사들을 ‘감금해’ 놓는 일회적 방식이라 면 내년도 난이도를 예측하기 어렵다. 오히려 격년제로 난이도가 오락가 락했던 것에 비춰보면 내년에는 수능이 또다시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결국 수험생들의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다. 따라서 전문가들 은 문제은행식 따위의 안정적인 출제방식을 정착시키는 게 시급하다고 충 고한다. 교육부에서도 장기적으로는 문제은행식 출제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문제은행식 출제를 꺼려왔 던 것은 문제지 유출과 같은 보안문제 때문이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별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입시지옥 탈출, 방법은 있다
물론 수능시험을 쉽게 출제하고 입시방법을 다양하게 개발·보완한다고 해서 당장에 사교육비 문제 따위가 일거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당분 간은 수능이 쉽든 어렵든, 어떠한 입시방법이 개발되든 고액과외나 학원 과외가 수그러들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서울 압구정동의 한 유명학원 부원장은 수능이 쉽게 출제될수록 사교육비는 늘어날 수도 있다고 우려한 다. 상위권 학생들은 1∼2개 차이로 대학 당락이 결정되기 때문에 더 악 착같이, 그리고 중위권 학생들은 조금만 더 공부하면 고득점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심리 때문에 고액과외의 열풍이 휘몰아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하지만 전문가들은 수능의 ‘자격시험화’, 이와 맞물려 다양하고 특성있 는 선발기제를 개발해 대학에 선발의 자율권을 보장해 준다면 조금씩 입 시지옥을 개선하는 효과를 가져올 거라고 낙관한다. 독서나 토론, 자원봉 사와 같은 경험이 실제로 자신의 능력 고양이나 대학선발에 유리하게 작 용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부모나 아이들의 심리상태에 영향을 끼칠 수밖 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수능이 쉽게 출제됐다고 달궈진 냄비처럼 들끓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용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1일 제 1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