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만리재에서

밥은 하늘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명암이 선명한 두개의 장면을 아주 씁쓸한 심정으로 지켜 보았다. 장면 하나. 일본의 최대 증권사 야마이치증권의 노자와 사장은 1 1월25일 파산신청 직후 한 TV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눈물로 호소했다. “ 회사가 이렇게 된 것은 순전히 제 책임입니다. 우리 종업원들에게는 아무 런 잘못도 없습니다. 제발 그들이 거리로 내쫓겨 헤매지 않도록 도와주시 기 바랍니다.” 초췌한 모습의 노자와 사장은 연신 허리를 90도로 굽힌 채 사죄를 청했다. 종업원들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는 대목에선 눈물을 펑 펑 쏟았다. 일본도 지금 야마이치증권은 물론 도쿠요시티은행 등 내로라 하는 금융기관의 파산이 잇따르고 그에 따른 자금경색으로 중소기업의 부 도가 줄을 잇고 있다. 환율 또한 1달러당 1백25엔대로 숨가쁘게 떨어지고 있다. 겉보기에 정도의 차이는 있어 보이지만 양상은 우리와 비슷해 보인 다.

그러나 거기엔 큰 차이가 있다. 한국의 부실이 정경유착과 관치금융 그리 고 재벌의 과도한 몸불리기 때문이라면 일본 금융기관의 부실은 그동안 담보로 잡고 있던 부동산이나 각종 금융자산의 거품이 걷히면서 채권가치 의 추락에 따른 것이었다. 이보다 더 크고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일본엔 노자와 사장과 같은 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없다.

26일 전경련은 파국적 사태에 대한 재계의 처방전을 발표했다. 앞으로 5 년간 임금상승률을 3% 이내로 억제하라는 것이고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를 손쉽게 하라는 것 등이었다. 난국의 책임과 짐을 온전히 노동자에게 떠넘 긴 것이었다. 그와 함께 한라중공업의 50% 감원 발표를 계기로 각 재벌기 업들이 감량 방침을 아주 당당하게 발표했다. 그러나 총수의 눈물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노동자들이 일손을 멈춘 현장엔 그의 지시가 분명한 ‘ 감원과 임금삭감’이라는 지침만 망령처럼 떠돌 뿐이었다.

장면 둘. 독일의 국경도시 도르트문트에선 지금 “바르샤바의 굴복”이란 제목의 오페라가 초연되고 있다. 독일통일의 기초를 닦은 빌리 브란트 전 총리(92년 작고)의 삶을 소재로 한 것이다. 오페라 제목엔 이런 사연이 있다. 1969년 총리에 선출된 브란트는 이듬해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한 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 유대인 학살의 상처를 가장 깊고 넓게 간직한 곳이다. 그는 우선 유대인 게토기념비를 찾았다. 그곳에 헌화하던 중 갑 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오래고 깊은 참회의 묵념을 올렸다. 그것은 이전의 어떤 총리도 생각지 않던 용기였다. 세계는 그가 보여준 용기에 찬사를 보냈다. 그의 굴복은 유대인과 독일에 화해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독일통일로 이끈 브란트의 이른바 ‘동방정책’의 성공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브란트에겐 굴복할만한 이유가 있었던 걸까. 천만에다. 그는 나 치에 찍힌 반국가사범이었다. 스무살 때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그는 게슈 타포의 추적을 피해 노르웨이로 탈출해야 했다. 노르웨이가 점령당하면서 다시 스웨덴으로 도망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지도자, 그런 정부가 없다. 파국은 왔지만 책임자 는 없다. 하다못해 유감조차 보기 힘들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만 난 무한다.

텔레비전 드라마 <용의 눈물>로 유명해진 정도전은 그가 정리한 <조선 경 국전>에서 위정자의 기본을 이렇게 정리했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민은 지극히 약한 존재이지 만 폭력으로 협박해서는 안 된다. 민은 지극히 어리석지만 꾀로써 속여서 는 안 된다. 민심을 얻으면 민은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 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 동생과 형을 무차별 살해한 이방원도 이쯤은 알고 있었다. 1차 왕자의 난 직후 탈권을 채촉하는 이숙번 등에게 이렇게 말한다. “천하를 잡기는 쉬워도 백성의 마음을 잡는 것은 어렵다. 백성 의 마음을 잡지 못한다면 천하는 모래성과 같다.”

그들은 왜 자책은커녕 백성의 쪽박마저 깨버리려는가. 빌리 브란트는 '바 르샤바의 굴복' 이듬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1일 제 1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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