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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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초긴축비상경영체제를 결의한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 해고와 임금삭감의 불길이 다른 대기업은 물론 재계 전체로 번지고 있다.)
“모가지가 가늘어 슬픈 짐승이여!”
국제통화기금(IMF)의 신탁통치시대를 맞아 노동자들이 싸늘한 겨울 길거 리로 내몰리고 있다.
IMF 구제금융을 계기로 한국경제에 근본적인 구조조정과 그에 따른 저성 장과 고실업의 고통이 불가피하다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IMF가 그것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 이다. 그러나 구제금융이 본격화되기도 전에 실직과 임금삭감의 매서운 칼바람이 노동자의 생계를 옭죄고 있다.
재벌의 잇단 고용조정계획 재계 전체로 번져
삼성그룹은 지난 11월26일 조직 30% 축소, 임원급여 10% 삭감 등을 골자 로 하는 경영체질 혁신방안을 전격 발표했다. 삼성은 “조직축소가 바로 인원감축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를 떠나는 사람은 많아야 2천∼3천 명에 그칠 것”이라는 해명이지만 이를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 다. 바로 하루 전 한라중공업이 전체 임직원 6천명 가운데 절반을 연말까 지 감원하겠다고 발표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이다. 한라중공업은 한발 더 나아가 잔여직원에 대한 임금 30% 감축을 선언했다. 아남그룹도 기다 렸다는 듯 임원 20% 감축, 비용 30% 절감 내용을 담은 긴축경영계획을 발 표했다. 성원그룹은 건설부문 3개 계열사의 관리직 과장급 이상 임직원 1 백여명 중 절반에 가까운 45명을 감축하기로 했다. 재계를 주도하는 삼성 의 초긴축 비상경영체제 발표가 다른 대기업들은 물론 재계 전체에 정리 해고와 임금삭감 도미노를 불러올 것이라는 걱정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IMF가 구조조정의 1순위로 꼽고 있는 은행, 종금사 등 금융기관 종사자들 사이에서도 대폭발 직전의 긴장감이 돌고 있다. 시중은행의 한 직원은 “은행의 경우 흡수하는 쪽은 전체 인원의 1/3, 흡수당하는 쪽은 2/3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고 있다”고 말한다. 감원 바람은 IMF 구제금융 요청 이전부터 시작됐다. 올들어 기아 한보 진 로 삼미 등 부실 대기업의 감원규모만 공식적으로 1만5천명을 넘는다. 자 구책으로 감원을 단행한 다른 기업들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난 다. 올해 이미 1천3백명을 감원한 쌍용그룹은 추가로 2백∼3백명을 더 퇴 직시킬 계획이다. 한화그룹도 올해 임원 30%(1백명), 일반직원 8%(1천5백 명)를 감원했다. 중소기업의 경우는 대기업들에 가려져서 그렇지 사정이 더 심각하다.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는 금융계도 제일, 서울은행을 포함 해 상당수 은행, 증권사들이 적게는 2백명에서 많게는 8백명에 이르기까 지 명예퇴직 형식으로 감원을 단행했다.
앞으로 엄습할 해고·감원사태 강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살 인적 수준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조짐은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전 경련이 지난 11월 현대, 삼성 등 27개 회원사 그룹들을 상대로 자구노력 현황을 조사한 결과 세개 중에 두개 꼴인 17개 그룹이 인력재배치, 인력 감축 등의 고용조정을 하고 있거나 추진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한국노동 연구원이 6백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68%인 4백9개 기업이 고용조정 실시계획이 있다고 대답했다.
자기재산 내놓는 등 재계 혁신 노력 필요
대량해고는 곧바로 실업률 상승으로 이어진다. 지난 3/4분기 중 국내 실 업자는 47만명. 실업률은 2.2%를 기록했다.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내년 실 업률이 3.5∼4%로 껑충 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대외 발 표용일 뿐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권순우 박사는 “연구기관들 내부에서 는 최소 5%, 높게는 7∼8%까지 예상하고 있다”고 말한다. 주당 18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시간제근로자와 같은 잠재실업자나 실업상태이면서도 취 업전망이 안 보여 구직활동을 포기한 실망실업자들까지 포함한 실질 실업 률은 두자리수로 높아진다는 지적이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의 박 성준 박사는 “지난 95년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멕시코의 경우 연간 1백만명 이상의 신규 실업자가 발생했다”면서 “우리의 내년도 실질 실 업률은 두자리수를 기록할 것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실업률 두자리수의 의미는 실업자가 현재의 50만명 선에서 2백만명 수준으로 늘어난다는 얘 기다.
실업률의 급상승은 당장 정부의 경제운용 중심과제가 지금까지의 성장, 물가, 경상수지에서 고용문제로 옮겨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또 노동 자 당사자들에게는 바로 생존위협으로 와닿는다. 다른 자산소득이 없는 노동자들에게 해고는 바로 사형선고와 같다.
문제는 기업들의 구조조정에 따른 고통이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전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계는 우리 경제의 전면적 구조조정이 불가피하 다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노동자들에게 모든 부담을 지우려는 데 대해 강 하게 반발하고 있다. 한국노총 노진귀 정책본부장은 “정부와 기업의 책 임을 망각한 채 IMF 구제금융 신청에 따른 위기감에 편승해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모두 지우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노총 의 윤우현 정책부국장도 “해고 외에도 고용조정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다 양한 방법이 있는데 기업들이 정리해고라는 최후수단을 바로 동원하고 있 다”고 지적했다. 노총은 곧 경제고용대책위원회를 구성할 방침이고 민주 노총도 최근 구성한 고용안정특별위원회를 통해 사용자들의 일방적인 정 리해고에 정면대응할 태세다.
학계에서도 정부와 기업의 접근방식이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지적이 많다. 고려대의 이필상 교수(경영학)는 “족벌경영에다 금융기관 차입금에 의존 한 과당·중복투자와 문어발식 경영으로 부실을 초래한 기업주들과 이를 방조하고 편승한 정부가 먼저 고통을 짊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고 말한다. 경제위기의 근본인 정부와 기업에 근본적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진정한 위기극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예를 들어 삼성의 경우 반도체에서 천문학적 규모의 이익을 얻고서도 총수 한사람의 고집으로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위기를 자초했다”면서 “잘못을 저 지른 재벌총수가 직접 사과를 하고 개인재산을 기업회생을 위해 내놓는 것은 물론 족벌경영체제를 전문경영인체제로 바꾸고 잘못된 투자는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IMF가 정리해고 등 국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도입을 직 접 요구할지 여부는 아직 유동적이다. 그러나 재계는 인원감축과 임금축 소 발표와 함께 원활한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경직된 현 노동시장 구조를 대폭 손질해야 한다며 공세를 펴고 있다. 전경련은 지난 11월24일 대선 후보진영에 ‘새 정부의 정책과제’를 건의하면서 △향후 5년간 임금상승 률을 총액 기준 3% 이내로 억제하고 △근로자 보호를 위한 현행 근로기준 법을 근로계약법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사용자단체인 한국경영자총 협회(경총)도 12월3일 회장단회의를 열고 2년간 유예된 정리해고의 즉각 시행과 근로자파견제 도입 등을 대통령선거 후보자들에게 건의하는 방안 을 논의한다. 경총의 김영배 상무는 “지금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냐를 따 질 단계가 아니다”면서 “기업이 무너져 모두가 일자리를 잃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고용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 다. 한경련의 박성준 박사는 “해고가 손쉬운 미국, 영국은 실업률이 낮 고, 해고가 어려운 독일, 스페인 등은 실업률이 높다”면서 “해고가 쉬 울수록 고용도 쉽게 창출되는 ‘실업의 역설’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부는 시행이 유보된 정리해고를 즉각 도입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재경원은 금융산업의 경우 구조조정이 시급 하다는 점을 내세워 정리해고를 허용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는 등 정부 안에서도 입장이 갈려 진통이 예상되고 있다.
노사갈등 발생 시 마이너스 성장 불가피
노동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해고나 임금감축 등을 강행할 경우 심각한 노사갈등이 불가피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정부나 사용자들이 노동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대안제시에 실패해 노사갈등이 폭발할 경우 성공적인 구조조정은 기대하기 힘들다. 외부의 힘을 빌려서라도 구 조개혁을 단행해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다는 희망마저 깨져 버리는 것이 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대형 노사분규가 발생할 경우 내년 경제성장률이 당장 2% 밑으로 떨어지고 99년에는 마이너스 성장이 불가피 하다고 예상했다. 실업의 증가는 소비위축에 따른 기업 도산과 경제회복 의 지연은 물론 세수차질, 사회불안심리 확산과 범죄 증가 등 각 분야에 서 심각한 후유증을 낳을 수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치권이 경제난에 대한 처방은 제시하지 못한 채 책임공방으로 날을 지새고 있다. 노총의 김종각 정책실 상임연구위원은 “결국 노·사·정 3자가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것이 관건”이라고 강조한다. 노동부의 조순문 고용정책실장도 “ 연말까지는 노·사·정 협의체를 만들어 임금, 고용, 물가 등에 대한 합 의점을 만들도록 노력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곽정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1일 제 1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