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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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병으로까지 불렸던 개미군단들도 국가에 대한 배신감과 엄청난 손해를 안고 객장을 빠져나갔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무표정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의 얼굴은 더욱 굳어져 있다. 쌀쌀해진 날씨 탓만은 아니다. 온 나 라가 4회 연속 월드컵 본선진출에 열광하던 것이 마치 먼 옛날 일 같다. 이제 아무도 월드컵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무엇인가 사람들의 어깨를 무 겁게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3류국가 국민이라는 허탈감
사람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주범은 우리가 스스로 불러들인 IMF의 구 제금융이라는 망령이다. 이 망령이 우리 경제를 지배하고 우리 경제의 판 을 새로 짜게 된다는 불길한 소식이다. 그 과정에서 회사가 무너지고, 실 직자가 거리를 헤메고, 물가는 뛰는 가운데 3류국가 국민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허탈감이다. 그리고 그것이 남이 아닌 자신의 현실로 한발한발 다 가오는 것을 맥놓고 기다려야 하는 불안감이다.
이미 30대 재벌 중 8개가 법정관리나 화의에 들어가 있고 앞으로 또 몇 개의 재벌이 비슷한 전철을 밟을 우려가 높다고 한다. 상위 서열의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금융시장에서 돈을 구할 수가 없어 흑자를 내고도 언제 부도를 내고 쓰러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렵게 목돈을 만들어 산 주식이 어느날 갑자기 휴짓조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손해 를 덜 보려고 팔려고 시장에 내놓아 보지만 사겠다는 사람이 없다. 돈으 로 바꾸기도 쉽지 않게 된 것이다.
주식을 산 손 가운데는 쓰고 남은 뭉칫돈을 들고왔던 큰 손보다 쓸 돈을 안 쓰고 적금이나 계를 부어 목돈을 만들어온 작은 손이 훨씬 더 많다. 이른바 개미군단이다. 자신의 퇴직금이, 딸의 혼수비용이 시간이 갈수록 졸아드는 것을 보다 못해 아예 증권시장의 문을 닫아버리라고 소리도 질 러보지만 목소리에는 왠지 힘이 빠져 있다.
대우증권 서초지점의 한 직원은 “구제금융 신청 전까지 이들 개미군단이 ‘의병’으로 불리며 주가를 떠받쳤던 것은 정부에 대한 한가닥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라가 외환부도를 내 국제사회의 처분을 기다리는 처지인데 소리쳐봐야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주식투자까지는 몰라도 그저 돈은 은행이나 높은 이자를 주는 금융기관에 맡기는 것으로만 배워온 사람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금융기관이 넘 어가고 문을 닫는 은행까지 나온다는 말에 이자는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 원금은 떼이지 않을지 걱정인 것이다. 직접 찾아가 정부가 원금은 물론 이자까지 보장한다는 설명을 듣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미심쩍은 표정은 완전히 걷히지 않는다. 그래도 불안한 일부 사람들은 돈을 빼내 이자는 적어도 안전하다고들 하는 은행으로 옮겨놓고야 안심을 한다.
명예퇴직한 선배가 차라리 부럽다
가장 어깨가 시린 것은 샐러리맨이다. 인원감축이 예고된 금융기관과 인 원감축계획이 발표된 일부 회사는 말할 것도 없고 거의 대부분의 회사 직 원들이 일손을 잡지 못하고 있다. 가장 탄탄하다는 국내 최고의 대그룹조 차 조직의 30%를 축소하겠다고 발표한 마당에 안전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회사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구내방송에 인원감축계획이 발표되고 길거리로 내팽개쳐지 는 것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설사 자신이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용케 살아남더라도 물가는 뛰는데 올해와 같거나 더 적은 봉급을 받고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에 목돈을 거머 쥐고 명예퇴직을 한 선배가 갑자기 부러워진다. 그러나 내년의 우울한 경 제전망으로 볼 때 퇴직금을 기반으로 창업한 선배들의 성공신화도 말 그 대로 신화가 될 것 같다.
삼성그룹 계열사의 한 간부직원은 “솔직히 윗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행 동도 더 조심하게 됩니다. 조직만 개편하고 인원감축은 없다고 하지만 전 혀 경험도 없는 분야로 가서 어떻게 버티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미 몰아닥치고 있는 불황의 한파에 뼛속까지 얼어있는 것은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들인지도 모른다. 서울 신촌에 있는 한 작은 금은방 주인은 사회가 뒤숭숭한데 혹시 금을 찾는 사람이 없느냐는 물음에 “요즘 돈 있 는 사람들이 다 달러를 사두지 누가 금붙이를 사느냐. 사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고 이따금 팔겠다는 사람이 오지만 자금회전이 안 돼 사주지도 못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힘들어 떠나려고 해도 마땅히 새로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지금같은 불황기에는 모두들 제자리를 잘 지키 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동의를 구하는 눈치다. 이날 오후 늦게까지 이 금은방에서 팔린 물건은 한돈짜리 돌반지 하나가 전부였다.
사회진출을 앞둔 대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반인 한 학생은 “친하게 지내는 친구 10명 가운데 회사에 들어가겠다던 두 친구 가 요즘 진로를 다시 고민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고 말 했다. 나머지 친구 8명 가운데 7명은 사법·행정고시나 공인회계사시험을 준비하고 있고 1명은 대학원 진학이 결정된 상태다.
실업자가 늘고 물가가 뛰면서 살기가 힘들어지고 사회 분위기가 침체할 때 자연히 늘어나는 것은 남의 것을 속이거나 강제로 뺏는 것이다. 이른 바 불경기 범죄다. 지난달 25일 전모가 드러난 1천5백억여원 규모의 어음 ·무역사기사건이 그 전조인지 모른다. 구제금융의 망령에 가위 눌린 듯 한 이런 사회분위기가 남의 나라 이야기인 듯한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제2독립운동 찬물 끼얹는 외제 쇼핑
일부 있는 사람들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외국여행을 마치고 김포공항으 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선물보따리 크기는 별로 줄어든 것 같지 않다. 굳 이 외국으로 나갈 것까지도 없다. 입점해 있는 70여개 점포 가운데 한개 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달러를 주고 사온 외국 유명상품만을 취급한다는 압구정동의 한 백화점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 이다. 한 직원은 “사회분위기의 영향이 없지는 않다. 구제금융 신청발표 가 나온 뒤 이전보다 손님은 약 10%, 매출은 20% 가량 줄었다”고 말했다 . 여전히 손님 10명 가운데 9명에게는 외환부도니 IMF의 경제신탁통치니 하는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김정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1일 제 1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