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경의 맛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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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새벽빛 스미는 부엌에서 떡을 쳐내는 탁씨 부부.)
“밥이 먼저냐? 떡이 먼저냐?” 밥과 떡의 기원을 물으면 대부분 밥이 먼 저일 것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옛 문헌과 유물, 유적을 보면 떡이 훨씬 앞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곡물을 불에 익혀 먹기 시작한 초기 원시인들은 죽처럼 끓여 먹었다. 그 뒤 시루 같은 토기에 곡물을 쪄 먹었고, 그 과정이 오래 계속되다가 비로 소 밥이 등장한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떡은 물론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떡이 밥보다 앞서는 것이다.
떡 만드는 방법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러 상당한 수준까지 발전하게 된다. <동국세시기> 등에는 이미 조선시대에 인절미와 송편, 시루떡 등을 만들어 팔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떡의 종류도 절기와 먹는 계기에 따라 무려 20여가지에 이르렀다. 설날의 흰떡, 단오의 쑥떡과 수리취떡, 한가위의 시루떡과 송편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고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팥시루떡이 있어야 했으며 아기가 태어나 백일이 되면 백설기를 쪄서 백 집에 돌려야 한다는 풍습까지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떡은 역시 밥에 비해 손이 많이 가는 만큼 “떡 본 김에 제사 지 낸다”는 옛말에서도 나타나듯 주로 제례나 잔치 때 기복의 의미로 먹거 나, 절식을 위해 이용돼 온 특별한 음식으로 일상의 주식과는 구별됐다. 이런 특성 때문에 자연히 떡은 나눠 먹는 음식이 됐고 먼길을 떠날 때 비 상식량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마을에 큰 잔치라도 벌어지면 며칠씩 떡을 쳐 가까운 이웃에서 먼 일가 친척들에게까지 보냈고, 명절 때면 집집마다 떡을 해 온 동네에 돌 려 “남의 떡으로 명절 쇤다”는 말을 실감나게도 했다. 그런데 우리의 식문화가 밥마저도 덜 먹는 경향으로 바뀌어가고 있어 평소에 떡을 먹기 란 여간해 쉽지 않게 됐다.
이런 현상과는 반대로 강원도 양양군 서면 송천은 떡마을로 전국에 알려 지고 있다. 송천마을은 전체 스물아홉집 가운데 열여섯집이 떡집이다. 마 을에서 떡을 만들기 시작한 지는 이미 20년을 넘고 있다.
새벽 두세시면 집집마다 부엌에 불이 켜지고 네다섯시면 사방에서 철썩철 썩 떡치는 소리가 퍼져 나온다. 이렇게 떡을 팔러갈 준비가 끝나면 서둘 러 학교갈 아이들과 집에 남을 식구들의 아침상을 차려놓고 아주머니들은 떡그릇을 이고 집을 나선다. 6시30분 마을 앞을 지나는 새벽 첫차부터 떡 그릇을 인 아주머니들이 줄지어 오른다. 여름철 낙산을 비롯한 동해북부 해수욕장과 설악동 일대 계곡이나 민박집에서 만나는 떡장사 아주머니들 이 바로 이곳 송천마을 사람들이다.
민속떡집(0396-672-4316) 탁영길(58)씨 부부도 올해로 15년째를 맞고 있 다. 더욱이 이 집의 소나무 떡판은 할아버지 때부터 대를 물려오는 것으 로 1백년이 훨씬 넘었다며 자부심이 대단하다.
떡은 주로 인절미와 송편이지만 다양한 맛을 내기 위해 수리취와 쑥을 넣 기도 하고 떡고물도 이것저것 준비해 놓아, 올해 칠십여섯이라는 노모와 5∼6명의 식구들이 둘러 앉아 떡 빚는 일을 거들지만 늘 일손은 달리는 편이다. 하지만 인절미를 잘라 고물을 묻히거나 송편을 빚는 일은 이제 눈 감고도 할 정도이고 모양새도 마치 한 사람이 빚어낸 것같이 일정하다 .
특히 이곳 떡은 무공해떡, 진짜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을 앞 9만여평의 논은 90% 이상 찹쌀만을 심어 인절밋감으로 쓰는데, 열목어 가 오른다는 맑은 물과 신선한 계곡바람 탓인지 1년내내 단 한번도 농약 을 치는 일이 없다고 한다.
더욱이 큰 솥에 장작을 때서 뜸을 오래 들인 찰밥을 떡메로 힘있게 쳐낸 떡이어서 도심의 기계떡과는 근본적으로 맛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차츰 전화로 떡을 주문해오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어, 산골 오지 마을이 지만 마을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고 희망차다.
식혜 곁들이면 손색없는 요깃감
옛날 할머니가 있는 집들은 지금 같은 초겨울이면 인절미를 만들어 시원 한 다락 선반에 얹어 두었다. 가족들이 차가운 날씨에 먼길을 다녀오거나 , 밤 늦도록 글을 읽기라도 하면 화로를 휘저어 불을 돋우고 석쇠에 떡을 올려 따끈하게 구워주곤 했다. 시원한 식혜를 곁들이거나 꿀이라도 한 수 저 얹어주면 더할 나위 없는 요깃감이 되었다.
갑자기 밤이 길어져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그냥 출근 길에 나서게 될 때, 이런 옛 할머니들의 지혜를 빌려오면 더 없이 좋을 것 같다. 인절미를 한되 주문해다 놓고 번철에 따끈하게 지져내거나 김을 올려 몇개 먹고 나서면 한나절까지 든든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송천마을에 떡을 주문하면 우편이나 버스편에 보내준다. 인절미의 경우 반말(4만원)부터 주문이 가능하다. 사흘까지는 굳지 않아 그대로 먹을 수 있고 굳은 다음은 냉장고에 보관해놓고 두고두고 먹어도 된다고 한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1일 제 1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