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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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내년 4.3 50돌 행사를 앞둔 시점에서 벌어진 비디오 작가에 대한 국보법 혐의 수사는 제주도민들의 아픈 상처를 덧내고 있다. 지난 4월 열린 4.3희생자 합동위령제. )
최근 제주에선 경찰이 4·3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비디오작 가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해 수사를 벌여, 그 배경에 관심이 쏠 리고 있다.
제주경찰청은 10월8일 4·3 등 제주 역사다큐물을 주로 제작하는 김동만( 30·스튜디오 21 대표)씨가 만든 영상물 <잠들 수 없는 함성 4·3항쟁>의 이적성 여부를 가리기 위해 압수수색을 벌이고, 대표 김씨를 소환해 이틀 동안 조사했다.
사상논쟁, 공안분위기 조성
경찰의 주장은 이 영상물이 미국과 우리 정부를 적으로 규정하는 이적표 현물이라는 것이다. 문제의 영상물은 2년 전 제작한 것으로 4·3 피해자 유족과, 당사자들의 인터뷰, 그동안 나왔던 각종 논문, 영상자료 등을 참 고로 만든 50분짜리 작품.
이와 관련해 제주지법 영장담당 양경승 판사는 10일 경찰이 김씨에 대해 신청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양 판사는 “김씨가 대학 시절 좌익성향의 학생운동을 한 적이 없고, 문제의 <잠들 수 없는 함성 4·3 항쟁> 다큐 비디오도 진실접근 과정에서 일부 부분이 좌익성향을 띠었지만 의도적인 부분은 없다”고 밝혔다.
경찰은 그동안 지역사회와 국내외 역사학자들의 4·3 진상규명 노력에도, 이번 김씨의 혐의내용 가운데 ‘좌익분자, 공산폭도들에 의한 폭동사건인 제주4·3사태’라고 4·3의 성격을 규정함으로써 극단적인 시각을 드러냈 다.
제주지역에서는 5∼6년 전부터 제주 최대의 비극인 4·3에 대해 각 단체 가 서로의 견해차이를 조금씩 극복하면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도민화합 을 위해 합동위령제를 여는 등 다각도로 노력해왔다. 또 대통령과 국회의 원, 지방의원 후보들이 4·3 문제해결을 공약으로 내거는 가 하면 제주도 의회가 진상규명을 위해 사건이 일어난 지 반세기 만에 피해조사 보고서 를 내고 국회에 청원하기도 했다. 이런 마당에 경찰이 예전의 시각으로 4 ·3을 재삼 규정한 데 대해 시민단체들은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사실 제주경찰은 그동안 4·3관련 각종 진상규명 운동을 다른 어떤 사건 에 비해 예민하게 지켜보아 온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김씨가 속한 4· 3 다큐멘터리 제작단은 그동안 아무런 문제 제기가 없다가 이제서야 문제 삼는 데 대해 현재 만들고 있는 다큐멘터리 제작 작업을 위축시키려는 의 도로 보고 있다. 제주4·3연구소와 제주범도민회, 제주연합 등 도내 시민 단체들은 김씨 연행과 관련해 ‘창작의 자유’와 ‘4·3 진상규명운동’ 을 탄압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항의성명을 잇따라 발표했다.
특히 이들은 내년 4·3 50돌을 앞두고 도내외 단체들이 각종 학술행사와 위령 및 문화예술사업 등을 준비중인 시점에서 경찰이 김씨를 전격적으로 연행해 조사를 벌인 것은 사상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도민들에게 ‘공안분 위기’를 조성해 내년 행사에 찬물을 끼얹게 하려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후원인들에 심리적 압박
더욱이 경찰이 김씨를 연행하면서 압수한 다큐멘터리 제작 후원인 명단을 토대로,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공무원이 그런 단체에 후원할 수 있느냐 ”고 묻거나 “다른 후원인들도 비디오테이프를 받았는데 받지 않았느냐 ”는 등의 압박을 가했다. 후원 움직임을 얼어붙게 하려는 것으로 해석되 는 부분이다.
이와 관련해 4·3 연구단체들은 “경찰이 관련자료를 공개하는 것은 고사 하고, 섣부른 행동으로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운동에 찬물을 끼얹거나 방해 하면 오히려 도민화합만 깨뜨리게 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들 은 또 이번 사건의 배경에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지도층 행세를 해온 4.3 가해자들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와 함께 4·3 이후 반세기 동안 ‘레드 컴플렉스’에 시달려온 제주 도민들의 깊은 상처를 다시 한번 덧내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제주=허호준 기자/ 한겨레 사회2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23일 제 17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