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격동하는 재벌/아남그룹

(사진/김주진 아남그룹 회장. )

아남산업 성수동 공장 6층에 세들어 사는 아남그룹 경영본부내 기획조정 실 홍보팀 직원들은 “올해보다 더 신명나게 일해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며 회사자랑에 침이 마른다. 창업 30주년을 한해 앞두고 올해 30대 그 룹에 처음으로 진입한 것을 시작으로, 불황 속에서도 임금인상률 7.3%로 30대 그룹 중 1위, 한가위선물과 함께 아남산업 전직원에게 특별상여금 2 0만원씩을 일괄지급한 것 하며, 비록 타 회사와 비교해 숫적으로 적지만 지난해의 2배인 3백명의 신입사원을 뽑기로 한 것까지 술술 이어져 나온 다. 지난해 주파수공용통신(TRS) 전국사업자로 선정된 것도 빠지지 않는 자랑이다. 내로라 하는 대기업들이 잇따라 풍랑에 던져진 배처럼 흔들리 고 있는 가운데 혼자 뱃노래를 부르고 있는 격이다. 무엇보다 불황을 모 르는, 반도체사업의 승승장구 덕분이다.


메모리칩 가격하락 문제 안돼

“주위 사람들 모두가 나를 미쳤다고 했다. 자식들조차 나를 말렸다.” 지난 68년,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반도체사업 에 뛰어든 김향수(86) 명예회장은 그의 자서전 <작은 열쇠가 큰 문을 연 다>에서 창업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 무렵만 해도 정부관료들 사이 에서조차 반도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김 명예회장의 나이 도 벌써 환갑을 바라보는 57세였음을 감안하면 주변의 만류를 이해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는 그러나 “당시 우주항공산업에서 소련에 뒤진 미국이 우주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데 혈안이 돼있던 만큼 전자산업 , 그것도 핵심이 되는 반도체야말로 매우 유망한 사업이라고 보고 과감히 투자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아남빌딩 옥상에 큼지막하게 세 워진 광고판의 ‘반도체의 선구자’란 문구를 그는 무엇보다 커다란 긍지 로 생각한다.

실제로 아남은 소비자들에게는 TV, 오디오 등 가전제품 업체로 더 익숙하 지만 반도체를 주력으로 성장해왔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그룹 전체 매출 액 1조9천8백여억원 가운데 1조1천2백여억원(56.7%)을 반도체사업에서 올 렸을 정도로 반도체 비중은 절대적이다. 한때 ‘고래들 틈에 끼어든 한마 리 새우’로 비유되던 아남산업은 현재 시장규모 40억달러에 이르는 국제 반도체 조립/테스트 외주시장의 40% 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아남산업은 지난해 경상이익 3백3억원에 1백97억원의 순이익을 냈지만, 성장세는 올해 들어 더욱 두드러진다. 올 상반기 매출액이 5천9백82억원 으로 지난해보다 9.76% 늘었고, 경상이익과 순이익은 각각 45.44%와 44.8 7%씩 큰 폭으로 뛴 것이다. 국내 반도체 3사가 메모리칩의 가격하락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에서 아남산업이 이같은 빼어난 실적을 올리고 있는 것은 반도체 칩 생산공정을 거친 제품을 받아 조립(패키징)하는 일 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공급이 늘어날수록 조립일감도 늘어나기 때문에 공급과잉이 전혀 문제가 안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아남산업은 비 메모리분야의 조립이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까닭에 메모리칩의 가 격 하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웨이퍼 가공사업에도 진출

(사진/아남산업 성수동 반도체 공장. 아남은 소비자들에게 가전제품 업체로 더 익숙하지만 반도체를 주력으로 성장해왔다. )

그러나 아남산업은 성장 가능성에서 볼 때 앞으로가 더 해볼 만할 것이라 는 게 업계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아남산업은 조립만으로는 높은 수익을 낼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지난해 11월 미국의 TI(텍사스 인스투르먼드)사 와 기술제휴로 부가가치가 높은 웨이퍼일관가공(FAB)사업에 본격 진출해 경기도 부천에 FAB공장을 설립했다. 7월부터 시험생산에 들어가 오는 11 월부터는 양산체제에 돌입한다. 부천공장에서는 TI사가 50%의 시장점유율 을 보이고 있는 비메모리분야의 DSP(디지털 신호처리)칩을 중심으로 웨이 퍼를 생산할 예정이다. 당초 이 DSP칩은 TI사가 생산량의 70%를 의무구매 해주기로 계약이 돼 있었으나, 다른 업체들로부터 구매요청이 쇄도해 의 무구매비율을 40%로 낮춰달라고 오히려 요청할 만큼 시장전망이 밝은 상 황이다.

아남의 생산설비 투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아남은 지난 95년 10월부 터 광주 첨단산업단지 13만평의 부지에 대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건설중이 다. 지난해 11월 1단계 공사가 완공돼 이미 월 1천만개의 제품생산능력을 갖췄다. 광주공장은 3단계 공사가 마무리되는 99년 말부터는 월 1억2천만 개 생산으로 현재 서울, 부천, 부평의 3개 공장을 합친 것보다 생산규모 가 더 커지게 된다. 김규현 기조실장은 “반도체 시장은 앞으로도 매년 2 0% 이상 계속 성장할 것”이라며 “더군다나 조립뿐 아니라 일관가공(FAB )부문에서도 거의 비메모리만을 하기 때문에 사업전망은 매우 밝다”고 자랑한다. 아남그룹은 창업 30년을 맞는 내년 3월1일부터 아남산업을 ‘ 아남반도체’로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반도체 전문그룹으로서의 이미지 를 부각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밝은 곳이 있으면 그늘도 있게 마련인지 비록 그룹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대로 작지만 그룹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아남전자가 고민거리 다. TV와 오디오를 주로 생산해온 아남전자는 가전제품 수입확대와 업계 의 출혈경쟁 속에서 지난 94년 10억의 흑자를 낸 이래 계속 적자다. 지난 해에는 무려 2백42억원의 적자를 내, 그룹 전체로 흑자가 12억원에 그치 는 저조한 실적을 낸 주범이 됐다. 부채율도 지난해말 기준으로 2천6백% 가 넘는다. 그러나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게 아남 그룹의 태도다. 그룹의 주축계열사를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남은 적자를 많이 내고 있는 오디오부문을 해외생산쪽으로 돌리는 데서 돌파구 를 찾고 있다. 오디오 부문의 국내생산을 중단한 아남은 지난 1월부터 건 설에 들어간 중국 현지공장이 이달중으로 준공되고 나면 문제는 해결되리 라고 기대하고 있다.


전자산업, 가전제품에서 멀티미디어로

반도체와 전자를 포함해 아남의 계열사는 모두 21개다. 그러나 아남건설 과 지난해 설립한 아남텔레콤(TRS)을 빼면 모두가 그만그만한 크기다. 건 설은 매출이 지난해 3천억대가 넘었지만 주로 그룹 계열사의 물량을 소화 하고 있다. TRS사업도 당장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아니라는 게 그룹의 인 식이다. 아남그룹은 최근 이들 계열사에 대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육상 운수업체인 (주)아신을 폐업하고, 목재용기 제조업체인 AV데이코는 분리 매각한다. 또한 유통업체인 한용양행과 제성체인, 그리고 전자부품업체인 한국나쇼날전기를 다른 계열사에 합병한다는 것이다.

김주진(61) 회장이 올해 그룹의 표어로 내세운 문구는 “우리의 경쟁상대 는 미래”라는 것이다. 창업자인 김향수 명예회장처럼 그도 “경영은 10 년을 내다보고 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한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남 이 구조조정을 통해 내놓은 그룹의 중장기 비전은 “제2의 창업선언”이 라 할 만하다. 아남은 반도체부문, 정보통신, 멀티미디어, 건설·환경, 금융서비스 등 5개 부문으로 구체적인 사업다각화 계획을 내놓았다. 2천 년 국내 재계 순위 10위, 세계 5백대 기업으로 진입하겠다는 연초의 청사 진을 구체화한 것이다.

반도체부문은 현재 그룹의 주력으로 집중적인 투자가 이뤄지고 있는 부문 이고, 정보통신 분야의 경우 TRS사업이 발판을 닦고 있다. 아남은 TRS 사 업의 경우, 앞으로 기술이 발달하면 PCS나 이동전화업체와 같은 내용의 서비스를 놓고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아남은 또 가전제품부문을 축소하는 대신 컴퓨터 관련 제품을 생산해 멀티미디어 사업쪽으로 전자산업의 중심을 옮길 계획이다. 건설·환경사업은 현재 부 가가치가 높은 건설공사 수주와 국내 최대의 폐기물처리업체인 아남환경 을 발판으로 기술개발에 집중투자한다는 복안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한 한 성장가능성을 지닌 것이 환경산업이라는 게 그룹쪽의 설명이다. 금융 부문은 현재 아남할부금융을 계열사로 갖고 있으며, 최근 한누리투자증권 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그러나 금융은 서비스를 외부로 확대해 나가기보 다는 30대그룹 진입에 따라 그룹의 안정적인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 하다고 그룹쪽은 설명한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덧붙여 “김주진 회 장은 인체공학 분야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귀띔 한다.


인체공학 분야에도 상당한 관심

김주진 회장은 92년 취임 당시,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과제로 “창업주 가 일궈놓은 기업을 21세기에도 연속성을 갖게 하는 것과 종업원들의 복 리후생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아남 그룹이 그동안 계열사별로 따로따로 돼 있던 심벌을 통일해 그룹의 새 심 벌을 정하고, 계열사의 이름을 정비하는 작업을 벌인 것은 “이제는 안정 을 이뤘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룹쪽은 파란색 동그라미 안 에 아남(ANAM)의 영문첫글자 A를 넣고, 나머지 영문자를 파란글씨로 뒤에 쓴 이 심벌에 대해 “미래지향적이며 세계의 중심에 있는 아남”이라는 기업상을 나타냈다고 말한다. ‘신참’ 아남그룹의 30대그룹 진입 신고식 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23일 제 1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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