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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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의사들의 총결집 체인 대한의사협회 임원진들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가 의과대학의 신 ·증설을 저지(!)하는 일이다. 그러한 임무가 회칙에 명시적으로 규정돼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의과대학의 신·증설 여부는 의사협회 회원들, 특히 개원 의사들의 이해가 걸려 있는 사항이기 때문에 협회의 운영을 맡고 있 는 임원들은 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관심 정도가 아 니라 가히 필사적으로 저지에 나서야 한다. 필사적이라고 하였지만 그 말 에 걸맞은 방법이 있을 턱은 없다. 기껏 정책당국을 설득하는 노력밖에는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민주사회란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하고 관철시키려는 다양한 이익집단의 공존을 전제로 한다. 만약 그러한 이익집단의 존재와 그들의 이익 추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이미 민주주의사회가 아니라 전체주의사회이다. 따라서 의사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 확대시키기 위해 단체를 결성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이다. 같은 맥락에서 조직을 통해 의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하고 추구하는 것 또한 당연히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한 행위를 집단이기주의라는, 우리 사회에서는 엉뚱하게도 무 시무시하고 음험한 의미로 통하는 용어나 다중의 힘으로라는 선동적인 표 현으로 매도하고 나서는 것은 결코 성숙한 모습도 아니거니와 그야말로 민주질서를 파괴하는 짓이다. 집단이기주의 운운할 때 내세우는 명분은 공익이다. 그러나 그 공익도 선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이해를 달리하는 집단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 과정에서 자연스럽고 합리적으로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의사들이 의과대학의 신·증설을 반대하는 배경에 그들의 이해가 깔려 있 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러한 사정을 애써 감출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집단이기주의의 발로라는 공세 앞에 감히 표 면적으로 내세우지 못하는 듯하다. 의과대학이 신설되고 학생 정원이 늘 어나면 의사의 공급이 그만큼 증가하여 기성 의사들의 이익이 침해될 가 능성이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의사, 특히 개원 의사들이 의과대학의 신·증설을 반대하는 것이며 일차적으로 그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의사 협회의 임원들이 저지 활동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익 추구 행위, 즉 의과대학의 신·증설 반대에는 사회적 으로 합당하고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때 의사들이 내 세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지금까지처럼 신·증설을 남 발하면 머지않아 의사의 공급이 초과하는 사태가 벌어지리라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 재정경제원 등 정부 일각에서는 앞으로 국민경제가 향상되고 그에 따라 국민들이 삶의 질을 더욱 추구할 것이므로 의료 수요 가 확대될 것이며, 또 지금보다 의료시장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서는 의사 의 공급이 더 확대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사실 공급은 비교적 정확 하게 예측할 수 있지만 수요를 예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리고 공급은 불요불급한 수요를 만들어낸다는 점까지 감안할 때, 어느쪽 주장이 타당한지를 가늠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의과대학 신·증설 반대의 또다른 이유는 신·증설로 의사들의 질이 떨어 지며 그에 따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리라는 것이다. 의과대학의 신·증 설 자체가 곧바로 의료 서비스 수준을 저하시킨다고 한다면 그러한 주장 은 무리일 터이다. 오히려 대학 간의 바람직한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더욱 양질의 의사를 배출할 계기가 될 수 있으며 또한 질낮은 의사들을 도태시 키거나 적극적으로 그들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 나 우리의 실정은 그러한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특히 이 몇년 사 이 새로이 설치된 몇몇 의과대학의 사정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의과대학 학생들이 임상 수련을 해야 할 부속병원을 마련하기는커녕 교수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의과대학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학생들이 동가식서가숙하 듯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임상실습을 하며, 다른 의과대학에서 출강나온 교수들로부터 오늘은 하루종일 A과목, 내일은 내내 B과목 식으 로 수업을 받는 모습도 드물지 않은 형편이다.
부실 의과대학들이 생겨나는 것은 설립 인가를 하는 데에 의료수급상의 필요와 학교운영능력이라는 정당한 기준보다는 ‘정치논리’가 앞섰기 때 문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선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않 겠다는 이번의 대통령 선거판에서 또 얼마나 많은 부실 의과대학이 탄생 할지 자못 걱정스럽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관심과 감시도 역시 우리 유권자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황상익/ 서울의대 교수·의학사 및 의료윤리학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23일 제 17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