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과학과 지성

사회혁명의 활로 찾는다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앤서니 기든스 지음 김현옥 옮김, 한울 펴냄

냉전의 한파가 물러선 뒤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헛간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 혁명적 사회를 갈망하던 전위대가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벗으려 안간힘 을 기울이는 동안 이성의 해체를 주장하는 ‘탈현대 증후군’이 거침없이 자리잡았다. 신보수주의와 결합한 반동적 시대정신이라는 비난도 탈현대 론의 물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이성의 종말은 탈현대론자들의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거품이 제거되는 가운데 탈현대론의 회의 주의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 것이다.


뒤바뀐 보수·진보의 논리 통합시도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의 <좌파와 우파의 경계를 넘어서>(김현옥 옮김, 한울 펴냄)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정치사상적 측면에서 일관성 있게 다루며 불확실성 시대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서구의 여러 정치이론으로 현실을 진단하며 빈곤과 생태학, 폭력의 문제 등에 실 천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초기의 저작에서 제시한 신뢰·유토피아적 현실 주의·위험사회 등의 추상적 방법론의 개념이 다양한 사회이론을 분석하 는 도구로 적용하기도 한다.

기든스는 근대성의 연장선에서 이성과 계몽을 옹호하면서 근대성의 문제 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근대세계는 자본주의(경제적 양극화), 산업주의( 생태학적 위험), 감시(민주적 권리의 거부), 폭력수단(대규모 전쟁의 위 협) 등 위험과 해악을 제도적으로 안고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이러한 위험은 단순히 억제·격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는 정통 정치 학 모델을 분석하는 가운데 현대사회에 도사린 불확실성의 구조를 극복할 대안으로 철학적 보수주의에 뿌리를 둔 ‘급진적 정치모델’을 제시한다. 현재 소멸된 것처럼 보이는 급진주의의 복원을 시도하는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기든스가 급진적 변동의 행태를 보수주의에서도 찾 는다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보수주의는 위계성, 귀족주의, 국가의 우위 성을 내세운 구보수주의의 개념이 아니다. 다만 개방적 대화와 불완전성 과의 공존을 꾀하며 급진주의를 함축한 철학적 보수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 그는 담화와 질문에 개방되어 연대성의 자원을 제공하는 전통을 옹호하 지만 종교적 근본주의 등을 잉태하는 본래의 전통은 수용하지 않는다. 그 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전통의 불안정한 혼합물일 뿐이다. 시장의 자유 를 장려하며 탈전통적 영향력을 해방시키지만 ‘강한 국가’ ‘가족가치 ’ 등의 전통적 상징을 불안정한 방식으로 결합하는 내적모순을 안고 있 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위적인 불확실성과 위험을 조절 ·복구하기 위한 전통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기든스는 과거에 급진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던 사회주의의 보수화를 지적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는 종말을 고하고 서구에 남아있는 사회주의는 복 지국가를 수호하는 데 급급한 수세적인 모습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의 복지국가는 전 지구적 빈곤에 대해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성 역할이 온존해 있고 비인격적인 관료주의가 여전하다는 것이다. 사회적 연대성의 재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복지국가는 보수화된 사회주의의 전형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계급과 성과 함께 삶의 정치문제에 주목해 ‘적극적 복지’를 실현하는 게 복지국가의 당면 과제라 하겠다.


일상의 주역이 비판적 참여자로 나서야

현재 전 지구적으로 보수의 급진화, 급진의 보수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시대의 사회혁명은 어떻게 이루어야 할 것인가. 기 든스는 탈결핍경제, 인간화된 자연, 대화민주주의, 협상된 권력 등을 사 회정치적 대안으로 설정한다. 그의 주요한 개념인 ‘유토피아적 현실주의 ’에 근거한 대안이다. 의지와 희망을 내포한 유토피아를 현실적 수단으 로 이루겠다는 것이다. 서로 모순되는 두 요소가 용해되어 급진적인 변화 를 가져올지는 지금으로선 판단하기 어렵다. 그는 일상생활의 주역이 비 판적인 참여자로 변화를 주도하면 급진적 정치모델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는 기든스의 사상적 편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지만 일관된 흐름 을 따라가기는 쉽지 않다. 서구의 다양한 사회이론를 ‘통합’했지만 이 론의 조화이기보다는 ‘짜깁기’에 가까운 흔적이 곳곳에 발견되기 때문 이다. 사회이론의 수많은 개념을 그의 ‘입맛’대로 재해석한 부분도 책 을 소화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도 현대 사회의 변화의 양상을 역동적으로 들려주는 기든스의 노력을 덮을 수는 없다.

김수병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23일 제 1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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