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삶

"핏줄이 불러 한국에 왔다"

(사진/한국인 친부모와의 행복한 만남을 꿈꾸는 김을동씨. 그는 뿌리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내년 7월까지 한국에 머물기로 했다.)

“나는 지금까지 3번 태어났다. 첫번째는 한국에서 태어난 것인데 아무런 기억도 없다. 두번째는 독일에 입양된 것이다. 세번째는 처음으로 한국사 람들을 알게 됐을 때이다.”

벤 니콜라스 일리겐스의 공식적인 나이는 24세이다. 어쩌면 25세거나 26 세일지도 모른다. 정확한 생년월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김을동’ 이라는 한국 이름도 갖고 있다. 역시 태어났을 때 부모로부터 받은 본명 은 아니다.

그가 가장 애를 태우는 것도 자신이 정확히 언제 세상에 태어났는지 그리 고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있었다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독일인’ 벤이 2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을동이’의 뿌리찾기에 나선 것도 ‘과연 나는 누구인가’라는 거역할 수 없는 의문을 풀고 싶었기 때 문일지도 모른다.


22년전 형과 함께 경찰서앞에 버려져

(사진/발견된 뒤 50여일이 지나 촬영한 형 갑동(왼쪽)씨와 을동씨의 모습. )

그가 독일의 양부모나 입양서류를 통해 알고 있는 것은 지난 75년 11월19 일 형과 함께 서울 성동경찰서 앞에서 발견돼 시립아동병원으로 넘겨졌으 며 이어 입양기관을 통해 독일로 입양됐다는 것뿐이다. 이들 형제의 본명 이나 생일을 추정할 만한 아무런 단서도 없었다. 단지 이들 형제가 헤어 져서는 안 된다는 듯 끈으로 두 아이의 팔이 묶여져 있었을 뿐이었다. 이 들은 당시 사직동에 있던 시립아동병원으로 옮겨진 뒤 75년 12월26일 홀 트사회복지회로 보내졌다. 홀트복지회 소속 경동원아기집에서 보모들에 의해 키워진 이들 형제는 76년 6월9일 그들의 ‘두번째 탄생’이 기다리 고 있던 독일로 떠났다.

갑동·을동 형제의 아버지 하르트무트 일리겐스(62)는 제약회사 간부이며 어머니 한넬로레(54)는 중학교 교사이다. 아이가 없었던 이들은 두 형제 를 입양해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았고 아이들도 훌륭히 성장했다. 형 갑 동이는 고교졸업 뒤 직업훈련을 통해 목재공예 자격증을 땄으며 공익근무 요원으로 14개월간의 군복무도 마쳤다. 여행과 자유스러움을 즐기는 예술 가적 기질을 갖고 있는 그는 현재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예술철학을 공부하 고 있다. 갑동은 얼마 전 독일에 관광온 한국 아가씨와 약혼을 했다고 한 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에 와보지는 않았다.

차분한 성격에 공부를 좋아하는 을동은 지난 9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 후 지금까지 4번이나 한국을 방문했다. 독일의 명문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베를린자유대 의대에 진학했다. 독일 대학생들의 0.1% 정도 만이 받을 수 있는 국가 장학금을 받는 촉망받는 외과의 지망생이다. 이 번에는 아예 4학년을 마친 뒤 휴학하고 한국에 와 연세대 어학당에서 우 리말을 배우고 있다.

“부모님은 내가 12세 때 한국에서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러나 형과 나는 완전한 독일인으로 성장했다. 내가 독일사람과 다르다는 생각 은 전혀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가족간의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실제로 우리에게 이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과 믿음을 넘칠 정도로 받았다. 부모님은 또 교육의 중요성과 자립심을 일깨워 주셨다.”


양부모 사랑으로 외과의사 눈 앞에

(사진/독일인 양부모는 을동씨 형제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었다. )

‘완전한 독일인’이던 을동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말 한 ‘세번째 탄생’이 계기가 됐다. 고교 졸업 전이던 지난 93년 독일 내 한국 교포학생과 유학생들로 이뤄진 ‘우리모임’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 다. 처음에는 선뜻 내키지 않았으나 부모들이 나가보라고 권유했다. 그는 처음 한국인들을 만났을 때를 ‘아담이 이브로부터 선악과를 받아먹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고 회상한다.

“처음으로 한국사람을 만나면서 한국인들이 같은 민족이라는 강한 유대 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국인들이 말하는 정이라는 것이 무 엇인지 느낄 수 있었죠.”

그는 이 모임에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사물놀이 등 우리 문 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95년에는 독일문화부에서 주최한 뮤직컨테스트에 서 교포학생 7명과 함께 ‘천둥소리’라는 팀을 만들어 사물놀이를 연주 해 우승하기도 했다. 지난 94년부터는 한국인 교회를 나갔다.

“그러나 한국인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들은 한국인이고 나는 독일인이 라는 생각이 커져갔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의 모습을 가진 독 일인이었을 뿐이었습니다. ”

그는 고교 졸업뒤 지난 93년 여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우리모임 에서 만난 교포 친구 3명과 함께 한달 동안 서울과 부산, 설악산, 제주도 를 여행했다. 사물놀이를 계속 배우기 위해 장구도 샀다. “처음온 한국 의 자연과 사람들이 무척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러나 솔직히 부모님이 있 는 독일에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지난 94년 겨울 3주 동안의 두번째 방한도 독일에서 사귄 한국유학생들을 방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대생의 현장실습을 위한 병원으로 천안에 있 는 단국대 병원을 선택해 지난해 8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천안에 있는 외 과에서 교환학생으로 머물렀던 게 3번째였다.

한국을 방문할수록 점차 자신의 뿌리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처음 으로 친부모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 한국과 한국사람을 알 기 위한 방문이었지만 어느새 자신을 알기 위한 여행으로 변해갔다. 그리 고 3번째 방문이었던 지난해 처음으로 자신의 독일입양을 주선한 홀트아 동복지회를 찾아갔다. 그러나 당시 기록자료가 없다는 담당자의 말에 그 냥 돌아서야 했다.


친부모 추적 실마리 아직 못 찾아

그러나 이번에는 최대한 끝까지 해보기로 했다. 어학당을 졸업하는 내년 7월까지는 많은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9월25일 다시 홀트아동 복지회를 방문했다. 당시 작성한 의료카드와 양부모가 입양수속을 위해 보낸 신상카드 및 이주수속 서류 등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출생을 추적해 볼 만한 단서는 아무 것도 없었다. 지난 10월8일 다시 홀트를 방 문한 을동은 사후상담을 맡고 있는 길기선씨의 도움으로 자신이 성동경찰 서에서 아동병원으로 넘겨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을동은 이어 서울 내곡동에 있는 시립아동병원을 방문했다. 아동병원쪽은 당시 성동경찰서로부터 짤막한 공문과 함께 이들 형제를 넘겨받았는데, 경찰서 공문은 보존기간이 훨씬 지나 이미 폐기됐다고 말했다. 병원이 보 관하고 있는 75년 당시 수용아 대장에는 을동이 형제가 성동경찰서로부터 아동병원으로 의탁됐다는 기록과 75년 12월26일 다른 아이들과 함께 홀트 복지회로 넘겨졌다는 기록만 나와 있었다. 대장에 기록된 18명의 아이들 가운데 1명만 박씨고 나머지는 모두 김씨였다.

아동병원 서무과 정대의씨는 “버려지는 아이들은 이름이나 생년월일을 추정할 만한 쪽지를 남겨두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 때문에 병원에 서는 당시 원장의 성을 따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줬다”고 말했다. 그래서 인지 이들의 생년월일도 갑동은 71년 3월26일로, 을동은 71년 2월5일로 엉뚱하게 기록돼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성동경찰서를 방문했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큰 기 대는 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이들 형제가 발견된 뒤 바로 아동병원 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간단한 공문 외에는 작성된 것이 없을 것이라며 이 나마 보존시한이 넘어 모두 폐기됐다고 말했다. 여기서 기록을 통한 그의 뿌리찾기는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한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

을동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아동병원에서 만들어졌으며, 홀트로 의탁된 75 년 12월26일을 기준으로 해 3세 가량으로 추정된 갑동이 형은 72년 12월2 6일로, 자신은 1년 2개월 늦은 74년 2월26일로 생년월일이 결정된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버려진 아이가 기록을 역추적해 부모를 찾기란 사실 상 불가능하다는 게 아동병원과 경찰쪽의 말이다. 을동 자신도 이런 사실 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이처럼 애타게 친 부모를 찾는 마음이 친부모들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것이다. “한번만이라 도 친부모를 만나고 싶습니다. 만약 저의 친부모가 당시 결정에 대한 죄 책감 때문에 망설인다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을 전해 드리고 싶습 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우 리 형제는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성장했으며 우리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창은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23일 제 1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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