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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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3년의 어느 밤,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20여km 떨어진 님프쉬 수녀원에 마차 두 대가 소리없이 다가섰다. 커다란 생선통이 가득 실린 마차였다. 담 밑에 마차가 멈추자 검은 그림자가 담을 넘어왔다. 모두 열둘. 그림자 들은 생선통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한 마차가 이윽고 도착한 곳은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의 포문을 연 신학자 마르틴 루 터가 사는 집이었다. 생선통에서 빠져나온 그림자들이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수녀들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 신학교수로 있으면서 교황의 면죄부 판매 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고 교회와 성직자의 타락을 고발해 파문당한 사람이다. 오늘날의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는 루터의 종교개혁 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파문 뒤, 루터는 성직자도 결혼할 수 있으니 성직자는 당연히 독신이어야 한다는 어리석은 법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라는 주장을 담은 ‘결혼에 관 하여’란 글을 발표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얼마 뒤 루터는 편 지 한통을 받았다. ‘카타리나 폰 보라’라는 이름의 수녀에게서 온 편지 였다. “저희들은 과연 일생동안 이곳에서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은 지 오랫동안 번민해 왔습니다.……. 저희 열 두명의 수녀는 이곳을 탈출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게 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어쨌 든 수녀원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신의 딸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습 니다. 도와주소서.”
본래 수녀원은 신앙생활을 원하는 여성들이 가는 곳이다. 하지만 그 무렵 유럽의 수녀원은 여성들의 은둔장소 혹은 유폐지나 다름없었다. 가난해서 생계를 이을 수 없거나 버림받은 처녀, 혼기 놓친 노처녀, 남편 잃은 미 망인 등 수녀원에 모여드는 여성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 의미로든 사회적 일탈자라는 사실이었다. 카타리나 폰 보라도 그 중 의 하나였다. 작센의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카타리나는 열살 때 새어머니를 맞고는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14년 동안 수녀원에서 산 그가 루터의 글을 읽고 용기를 얻어 편지를 쓴 것이다.
탈출에 성공한 수녀들은 루터의 도움을 받아 숨어지내다 3명은 집으로 돌 아가고 8명은 결혼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카타리나는 루터 곁에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당시의 성경은 모두 라틴어로 씌어 있어 서 교육받지 못한 일반인들은 읽을 수가 없었다. 특별한 소수만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루터는 독일어 번 역을 하는 중이었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루터와 카타리나는 결혼 을 결심했다. 카타리나가 수녀원을 도망친 지 2년, 루터의 나이 42세, 카 타리나가 26세 때의 일이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려야 정식 부부로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파문당한 성직자 루터와 도망친 수녀 카타리나는 그럴 수 없었다. 형식보다는 양심 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사람 의 결혼 뒤,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상호합의에 의해 곧바로 결 혼생활을 시작하는 이른바 ‘양심결혼’이 루터를 따르는 수도사들 사이 에 널리 퍼졌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무척 행복했다. 카타리나는 신앙심 깊은 ‘영적 동 료’로서 남편을 도우며 루터가 좋아하는 포도주를 늘 빚어놓고 3남3녀를 낳아 키웠다. 루터는 아내를 ‘박사’‘설교자’‘사랑하는 주님’이라 부르며 깊이 사랑했다. 오늘날 카타리나는 종교개혁 시대의 변화된 여성 상의 구현으로, 두 사람이 일군 가정은 종교개혁으로 새롭게 태어난 프로 테스탄트 가정의 모범으로 일컬어진다.
박은봉/ 역사연구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23일 제 17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