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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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편입된 러시아도 미국의 경제논리에 서서히 길들여지고 있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모스크바의 걸인들.)
“경제기술 협력하겠다더니 웬 석유이권 요구냐.”
지난 9월 말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9차 러-미 경제기술 협력위원회 회의에 서 미국쪽이 석유채굴 프로젝트에 미국 기업이 참여할 수 있도록 조처를 할 것을 요구하고 나서자 러시아 내에서는 미국이 본색을 드러냈다는 지 적이 곳곳에서 제기됐다.
러-미 경제기술 협력위원회는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클린턴 미국 대통령 이 러시아 내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양국 기술을 교류하며 우의를 돈독 히 한다는 취지 아래 구성한 것이다. 이 위원회의 정치적 위상은 공동의 장이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국무총리와 앨 고어 미 부통령인 데서 도 알 수 있다. 위원회는 그동안 공동 우주개발계획을 추진하는 등 탈냉 전 시대의 훌륭한 성과물을 이뤄낸 것으로 인정돼 왔다. 하지만 회의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미국쪽은 러시아 시장에서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채우 는 데 더 관심을 쏟아왔다는 비판이 비례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은 미국이 이번엔 정말 ‘본색’을 드러냈다고 생각한 다. 고어 미 부통령이 러시아에 도착하자, 이틀 전에 먼저 와서 러시아쪽 과 협상을 벌였던 페데리코 페니야 미국 에너지 장관은 고어·체르노미르 딘 두 공동의장 앞에서 “석유채굴 프로젝트에 미국 회사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에 고어는 즉각 체르노미 르딘에게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요구했다.
석유채굴 문제는 위원회의 주요 의제에서 벗어난 것인 데다, 위원회 공동 의장인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총리와는 직접적인 관계도 없다. 따라서 많 은 국민들은 미국이 ‘건방지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했다. 또 석유개발은 러시아가 미래의 주요 소득원으로 잡고 있는 분야다. 미국 이 이를 두고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쪽은 면전에서 발끈한 잘못(?)을 서둘러 인정하고는 곧바로 대안을 제시하는 등 ‘미국의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써야만 했다. 이유 인즉 러시아 정부는 현 경제상황을 개선하는 데 러-미 경제기술 협력위원 회의 도움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해왔다. 따라서 잘잘못을 떠나 러시아쪽이 미국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아 미국의 경제협력을 받아내지 못한다 면, 현 정부가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 다.
한때 미국과 팽팽히 맞섰던 러시아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식으 로 미국에 의해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미국의 입장에서는 경제 협력을 미끼로 러시아를 ‘이익 창출을 위한 보고’로 만들어내고 있다. 러시아는 마치 블랙홀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미국의 경제논리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모스크바=강완구 통신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23일 제 17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