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정연주 특파원이 독자에게/ ‘미국’이라는 나라

독자들은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시 양해해주기 바란다. 82년 말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7년을 살았다. 아열대성 기후이기 때 문에 휴스턴의 날씨는 덥고 습도가 높았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옅은 빛깔 의 옷을 늘 입고 다녔다. 텍사스에 사는 7년 동안 나는 ‘미국 사람들’ 은 짙은 빛깔의 감색이나 밤색옷은 잘 입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8 년 전 <한겨레> 특파원으로 워싱턴에 와 보니,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 이 짙은 빛깔의 옷을 입고 다녔다. 보스니아에서 비행기 사고로 숨진 론 브라운 전 상무부 장관은 늘 짙은 감색의 정장을 하고 다니기로 유명했다 . 내가 만약 휴스턴에만 살다가 미국을 떠났다면, 나는 틀림없이 “미국 사람들은 짙은 빛깔의 옷을 거의 안 입더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너무 손쉽게 단 정짓거나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미국에 오래 살면 살수록 이 나라가 정말 복잡하고 다양한 곳이라는 것을 절실하 게 느끼게 되고, 그래서 ‘미국’이라는 나라, 사회, 제도를 정확하게 이 해한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기에 ‘미국’을 이야기할 때에는 우선 그 대상과 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매우 중 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글에서 ‘미국’이라고 할 때, 그것은 미국의 대 외정책과 이를 결정하는 파워 그룹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던 기원전 1-2세기, 당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유럽권은 로마에 의해 강제된 평화가 유지되었다. 이는 팍스 로마나(P ax Romana)로 불렸다. 19세기 태양이 질 날이 없었다던 대영제국의 질서 가 유럽을 지배할 때 이를 가리켜 ‘팍스 브리타니카’라고 불렀다. ‘팍 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면 미국의 질서와 힘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로, 미국 중심주의, 미국 제일주의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로 볼 수 있다.

냉전시대에 미국은 공산주의권을 포위하는 자본주의권의 맹주로 ‘팍스 아메리카나’를 적용했다. 당시엔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 반공을 위한 안보전략, 이를 뒷받침하는 외교와 군사관계가 핵심을 이뤘다. 반공 이데 올로기에만 부합되면, 다른 것은 부차적이었다. 중남미, 아시아 등에서 그 나라의 정권이 군사독재이건,부패한 정권이건 상관없이 오로지 ‘반공 ’이기만 하면 든든한 후견자가 되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빛깔을 띄면 서 좌파적 성향을 보이기만 하면 그 정권을 가차없이 처리해 버렸다. 칠 레 등 중남미 국가의 사례들은 이를 잘 반영해 준다.

냉전시대에는 이처럼 반공 이데올로기와 이를 위한 안보, 외교, 군사관계 가 절대적 우위에 있었으며, 그래서 이를 다루는 외교를 ‘고차원 외교’ (high diplomacy)라고 불렀다. 그리고 통상문제나 그밖의 부차적인 문제 를 다루는 외교를 ‘저차원 외교’(low diplomacy)라고 낮춰 부를 정도였 다.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권이 붕괴되는 등 냉전시대가 끝나면서 팍스 아메 리카나의 내용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정보통신 기술의 혁신적인 발 전과 세계화로 상징되는 시장개방의 급속한 확대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중 심축은 경제로 옮아가게 되었다. 냉전시대에서 세계화 시대로 옮아가는 중간에 있었던 걸프 전쟁은 미국의 군사력과 이를 바탕으로 유일 강대국 의 지위를 독점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미국은 이제 공산권을 포위하는 자본주의권의 맹주가 아니라 전세계를 경영하는 ‘신세계 질서’의 중심 에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