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진단

토론이 아니었다, 농락이었다

(사진/철저히 시청자를 농락한 토론회. <한국논단> 이도형 발행인이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를 상대로 `사상을 검증'하고 있다.)

다시 수구냉전세력이 발호하고 있다.

이들은 TV 3사를 앞세워 엉터리 '사상검증'을 실시하는가 하면 일부 공안 세력을 통해서는 조직사건을 꾀하는 등 조작된 이데올로기 공세를 강화하 고 있다. 특히 방송 3사가 생중계한 지난 10월8일 <한국논단>(발행인 이 도형)의 ‘대통령후보 사상검증 대토론회’는 노골적으로 '보수=집권당' 이라는 등식을 확인시켜줘 충격을 던졌다. 이와 함께 방송 3사는 이날의 편파적이고 비상식적인 내용의 토론회를 7시간 동안 전국에 생중계해 수 구냉전세력의 선전도구로서 구실을 분명히했다. 또 일부 유력일간지도 이 에 편승해 냉전세력의 기득권보호에 앞장섰다.


이 후보엔 아부, 저 후보엔 협박

<한국논단>의 토론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토론회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했 다. 야당의 한 후보를 용공분자로 몰아가는가 하면, 여당후보에 대해서는 이미 사상검증이 완벽히 끝났다는 식으로 분류해 선거운동에 앞장서는 모 습까지 보였다. “우리나라는 법치에 의한 도약이 필요한데 법치의 표상 인 분이 후보가 된 것은 시대정신의 반영”이라거나 “장남의 소록도 봉 사로 병역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는 등의 ‘선거운동성’ 발언은 편파 성의 극치였다. 반면 김대중 총재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사상검증을 받 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며 협박성 발언까지 했다.

이날 토론자들로부터 ‘친북단체’로 표현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5 개 시민사회단체는 <한국논단>을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기로 해 법적인 다툼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노조가 없는 SBS를 제외한 KBS와 MBC 노조들도 발끈했다. 이들 방송사 노조들은 성명을 내 “시대착오적인 극우 패권주의자, 극우 파시스트들의 집단이 우리 사회에 서 당당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서글프다”며 “공영방송이 이런 집단의 선전장으로 전락해 철저히 농락당한 것에 심한 모욕감을 느낀다”고 밝혔 다. 이들 노조는 결과적으로 선거법을 어기고 방송사의 이미지를 떨어뜨 린 회사쪽에 책임을 묻고 이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했다.

전문가들은, 사상검증 토론회 사건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극우냉전세력 이 이번 대선을 통해 사회적 발언권을 키우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고 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고 분석하고 있다. 즉,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제도권 정치에서 더욱 멀어진 극우냉전세력이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들은 군부독재정권 시절에만 해도 권력핵심부와 이데올로기적으로 유사성을 보여 자신들의 주장을 굳이 내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냉전체제의 해체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김영삼 정부 이후 절차 적 민주주의가 진전을 보이는 등 자신들의 입지가 계속 줄어들자 조직적 인 움직임을 보이며 극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들은 특히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이용해 정치인 들에게 색깔론 공세를 펴며 자신들의 극우냉전논리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 하기도 한다. 반공과 반북의식이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색깔론의 대상이 되면 얼마나 곤욕을 치를지를 잘 아는 정치인들은 이들과 논쟁을 벌이는 대신 그들의 시각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날 토론회에서도 대 선후보들은 경쟁적으로 강경한 극우 발언을 했다.


헌법파괴적인 ‘사상검증’ 용어

대선후보들이 이런 상식 이하의 논조를 유지하는 <한국논단>의 토론회에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상문제에서 깨끗해야 우리 사회에서 살 아남을 수 있다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한 결과다. 사상문제로 상대방 을 공격하는 정치행태가 구시대적인 것이지만, 색깔론은 아직 우리 사회 에서 유효하기 때문이다. 사상시비로 공직을 떠나야 했던 인물은 최근에 도 있었다. 한완상 전 통일원장관이 극우언론의 집요한 공세로 곤욕을 치 르다 물러났고 개혁을 하겠다며 신한국당에 입당하려던 일부 운동권 인사 들도 사상검증 공세를 피할 수는 없었다. 특히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역대 선거에서 가장 많은 사상시비를 받은 인물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이 들 극우세력은 <김대중 X-파일>, 등의 책을 이용해 김 총재의 사상에 대한 집요한 공세를 계속하고 있다.

한국사회 극우세력의 흐름은 1950년대 초반 미국에서 일었던 매카시즘과 같은 일시적 역풍과 달리 항상적인 기류를 유지해왔으며 정권 연장의 이 데올로기가 돼 왔다. 일제하에서 친일파 전쟁동원 단체를 구성했던 이들 이 해방 이후에는 반공을 유일한 정치적 신념으로 내세우는 우익청년단체 들로 바뀌었고 이들이 다시 우익단체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의 우익집단 연구>라는 논문을 쓴 류상영 박사에 따르면, 한국사회 에서 극우라고 지칭되는 세력은 분단 및 자본의 논리, 외세의 지배전략과 결합되어 자기의 활동영역을 찾아왔다. 이들 집단은 반공이데올로기로 지 배이데올로기를 보강해왔으며 지속적인 동원정치를 통해 분단체제를 재생 산·강화해왔다. 이들의 폭력적 논리와 행동은 항상 비민주적인 지배권력 에 의해 지탱되었고, 분단체제의 물리적인 국가기구에 의해 구체화하면서 정치 사회의 각 방면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이들의 주장은 다양한 형태로 제기된다. 사상공개제, 사상심사제, 사상선 서제, 사상실명제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사상검증’은 이들의 오 래된 주장이다. 88년 여름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글로 파문을 일으켰 던 양동안씨도 ‘공직자 사상공개제도’가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사상검증이란 말 자체가 헌법파괴적인 요소를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말한다. 헌법이 규정한 양심·사상의 자유와 배치된 다는 것이다.

한편 경찰은 최근 동아대 자주대오 관련자들을 북한의 노동당에 가입했다 는 혐의로 구속했다. 지난 92년 대선때 터뜨린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을 연 상시키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학부형과 변호인들의 끈질긴 추적 끝에 노 동당 가입 혐의가 물리력에 의해 강요된 진술이라는 점이 드러남에 따라 검찰은 기소단계에서 이 혐의를 제외시켰다. 물론 이 사건은 단순 보안법 위반으로 규정되고 있지만 앞으로 또 다른 조작사건을 예고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볼테르는 “당신의 주장에 찬성하지 않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는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했다.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의 말을 끝까지 듣는 아량을 가졌다는 프랑스 국민의 ‘톨레랑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상을 검증하겠다고 나서며 자신들의 주장과 다르면 모조건 빨간색을 칠하는 우 리 사회의 고질병을 이제는 버려야 할 때다.

김창석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23일 제 1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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