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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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신한국당의 DJ비자금 폭로에 대해 재계는 충격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 1월 전경련 회장단 회의.)
“완전히 불장난이다.” “여당과 야당이 뒤바뀐 것 아니냐.” “자신의 정치적 목적만을 위해 경제를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똥통에 빠졌다 나온 개가 티끌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신한국당이 지난 10월6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거액 비자금을 관리해 왔다고 폭로한 데 이어 10일에는 급기야 10개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 1백 34억원을 받았다며 관련기업들의 이름까지 발표하자 재계에서는 격앙 이 상의 분노가 쏟아진다.
“사면이 엊그젠데…” 허탈감
김 총재에게 돈을 준 것으로 거론된 기업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라 고 경악을 감추지 못하면서 사실확인을 유보하거나 아예 부인하고 있다. 삼성그룹은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고 (김 총재에게 정치자금을 주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면서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대우 그룹은 “코멘트할 게 없다”며 철저히 ‘엔시엔디’(부인도 시인도 않는 것) 자세로 일관했다. 신한국당이 거론한 기업 중 돈 액수가 가장 큰 동 아그룹도 “신한국당의 발표가 아직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 룹 입장을 밝힐 단계가 아니다”며 곤혹스러워 했다. 진로그룹 한 관계자 는 “소식을 듣고 장진호 회장에게 긴급보고했으나 ‘오래된 일이라 기억 나지 않는다’는 답변을 들었다”면서 전 임직원들이 매달려 있는 그룹 회생노력에 악역향을 주지 않을까 불안스런 표정이다. 벽산그룹과 (주)한 창은 아예 “전혀 근거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기아자동차의 1차 협 력업체인 풍성전기와 대동건설도 “중소업체가 굳이 정치권과 교류할 일 이 있겠느냐”며 비자금 제공설을 부인했다. 비자금 사건 때마다 단골로 이름이 오르내렸던 대호건설의 경우 “회사 경영권이 95년 11월 수산중공 업으로 넘어가면서 회사 간부들이 모두 바뀌어 당시 상황을 전혀 모른다 ”고 말했다.
관련기업들은 물론 다른 그룹들과 경제단체들도 신한국당의 ‘막가파식’ 행동에 할말을 잃었다는 반응이다. 집권당으로서의 위치나 경제에 끼칠 파장은 아랑곳않고 기업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삼 성, 대우, 동아건설, 진로 등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총수들 이 유죄를 선고받았던 기업들은 “개천절 특별사면으로 총수들이 멍에를 벗은 게 불과 일주일 전”이라면서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장 불화살 을 맞은 삼성그룹은 “이렇게 경제가 어려울 때 기업을 거론해 희생양으 로 삼아도 되는지 모르겠다”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대우그룹도 “경 제와 기업이 죽든 말든 (김대중 총재와) 싸움을 하겠다는 것이냐”며 목 소리를 높였다. 또다른 그룹의 한 임원은 “신한국당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미 몇년이나 지난 일 아니냐”면서 “전·노 비자금 사건으로 큰 홍역을 치렀는데 기업들이 과거 일로 다시 발이 묶이게 됐다”고 안타 까워 했다.
재계는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이 김대중 총재의 비자금 관리와 불법 실명전환, 이른바 ‘20+알파설’의 증거들을 공개한 다음날인 7일부터 정 치권과 증시에서 신한국당이 2, 3단계 폭로작전의 일환으로 김 총재에게 정치자금을 건넨 10여개 기업의 이름을 폭로할 것이라는 루머가 돌자 바 짝 긴장하고 있었다. 특히 기업들의 이름이 10대 그룹에 속하는 S그룹, D 그룹과 D건설 등 영문 이니셜로 흘러나오자 관련기업들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채널을 통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력한 우려의 뜻을 여권의 요로요로에 전달하며 필사적인 노력을 폈으나 끝내 무위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DJ비자금 리스트에 들어 있지 않는 그룹의 한 임원은 “10일 오전까지만 해도 경제계의 걱정이 반영돼 추가폭로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신한국당이 내부방침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오후에 갑자기 매파들 에 의해 기류가 급변한 것으로 안다”면서 “해당기업들의 허탈감이 더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에 대한 거부감 오히려 희석
2차 폭로가 나온 뒤 재계에서는 신한국당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이 확산되 고 있다. 특히 이런 기류는 해당기업들은 물론 재계 전반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ㅎ그룹의 고위 임원은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 리고 있는 김대중 후보에게 타격을 가하자는 것 같은데 신한국당이 국민 들을 너무 얕보는 것 같다”면서 “신한국당이 이번 발표는 오히려 자살 골이 됐다”고 독설을 내뱉었다. 또다른 그룹의 임원은 “폭로전도 효과 가 없으면 ‘북풍’을 동원하겠지만 이제 휴전선에서 총소리가 아니라 대 포가 터져도 민심을 역전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재계 에서는 높은 국민 지지율에도 김대중 총재에 대한 거부감이 알게 모르게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대중 총재가 신한국당 의 폭로에 대해 “기업인과 친지들로부터 대가있는 돈을 받은 적이 없으 며, 위험을 무릅쓰고 야당을 도와준 기업인 등을 끝까지 보호하겠다”고 밝히자 재계는 “여야가 완전히 뒤바뀌었다”며 김 총재와 국민회의를 다 른 눈으로 보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재계에서는 기업들이 야당에 보험금조로 정치자금을 갖다 주었다 하더라 도 여당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이 전달된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때문에 신한국당의 폭로를 후안무취한 행동으로 비난하는 것은 어쩌면 당 연하다. 한 그룹의 관계자는 “야당에 1백34억원이 갔으면 여당에는 최소 한 그 몇십배의 돈이 간 것 아니냐”고 빈정댔다. 해당기업들의 직원들 사이에서는 “강압에 의해서든 자발적이든 여당에 갖다 준 정치자금을 이 번 기회에 아예 다 까발리자”는 폭탄선언 불사론까지 나오고 있다. 민간 경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신한국당이 DJ비자금 폭로를 ‘국민의 행복 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는 충정’이라고 미화하고 있으나 이를 곧이 듣는 국민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이 여당과 야당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 실태는 지정기탁금 현황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93년 이후 올 9월19일 까지 여당에 대한 지정기탁금은 총 5백58건에 1천1백58억원에 이르는 반 면 야당은 한푼도 없다. 여당에 대한 지정기탁금은 94년 한해를 제외하고 는 매년 증가 추세를 유지하고 있다.
‘여당 정치자금은 야당의 수십배’ 라는 것이 빈말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재미있는 실례가 있다. 국민 회의 추미애 의원이 최근 입수한 중앙선관위 자료에 따르면 금호그룹은 김영삼 정권 아래서 여당에 모두 열차례에 걸쳐 90억원의 지정기탁금을 냈다. 금호보다 지정기탁금을 많이 낸 기업은 단 한 곳뿐이다. 이 그룹은 모두 12차례에 걸쳐 1백44억2천5백만원을 기탁했다. 재계 10위권 밖인 금 호그룹이 여당에 두번째로 많은 지정기탁금을 냈다는 것은 얼핏 보면 이 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지난 95년 말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서도 드러나듯이 기업들이 정치자금을 내는 규모는 각 그룹의 외형과 거 의 비례한다. 지난 91년 전경련이 50억원의 자금을 정치권에 기탁했을 때 도 그룹별 분배는 이런 원칙이 철저히 지켜졌다. 경제단체의 한 임원은 “김 대통령 자신은 정치자금을 안 받는다고 하지만 결국 금호그룹보다 외형이 큰 10대 그룹들은 지정기탁금 외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비공식적으 로 여당에 전달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면서 “5대 그룹의 경우 그 액수 는 금호의 몇배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신한국당의 DJ비자금 폭 로는 제얼굴에 침뱉기라는 비아냥이다. 실제로 증권가에서는 신한국당 경 선을 앞두고 한 그룹이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 진영에 3백억원을 전달했다 는 루머가 파다하다.
“고비용 정치구조 개선 호기” 시각도
재계는 이번 DJ비자금 폭로 사건이 전·노 사건에 이어 제2의 비자금 사 건으로 비화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검찰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기아사태로 인한 금융시장의 불안 으로 기업들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상황에서 재벌 총수들이 줄줄이 검 찰에 소환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 법정에까지 서는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반응이다. 그룹 총수가 해외출장중인 해당그룹의 한 임원은 “비자금 사건으로 실추됐던 기업 이미지가 다시 훼손되는 전철을 밟게 됐다”면서 “당장 진행중에 있는 해외사업에 차질이 빚어질까 걱정된다 ”고 안타까워 했다. 민간경제연구소의 한 임원은 “환율과 금리 불안으 로 기업들이 내년도 사업계획조차 제대로 못세우고 고전하고 있는데 사태 가 장기화될 경우 우리나라 전체 경제와 기업들의 대외 신인도와 이미지, 해외사업에 타격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 일부에서는 이번 사태가 지난번 전·노 비자금 사건에 이어 정경유 착의 검은 고리를 근절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타내고 있다. DJ비자금 명단에 빠져 있는 한 그룹의 임원은 “이유나 경위야 어쨌든 기 업들이 정치권에 돈을 갖다 주었다면 잘못된 일”이라면서 “당장은 경제 에 끼치는 부작용이 우려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고비용 정치구조를 개선 하는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단체들 도 이와 관련 조만간 모임을 갖고 정치권에 대한 자제 촉구와 정경유착 근절 의지를 재확인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곽정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23일 제 179호